한상억 전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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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주 전 큐닉스컴퓨터 회장

서울대 통신공학(전자공학)

금성알프스(주) 대표이사

LG이노텍(주)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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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구 전 삼부토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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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헌 전 서울대 수학교육과 교수

일본 동경물리학교(現 토쿄공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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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태악(辛泰嶽) 前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신태악(辛泰嶽)

 

1902∼1980 법률가.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일성(一星). 함경북도 부령출신.
1919년 경성공업학교 재학중 3·1독립운동에 학생대표로 참가하여 6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21년 신의주설화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24년에는 시대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활약하였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 1931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1932년에 변호사 개업을 하여 신간회의 재건을 위하여 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발명협회 이사,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 취체역을 지냈다.
1942년 일제의 사법당국으로부터 사상불온이라는 이유로 8개월의 변호사직무정지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구국문화사(救國文化社)를 창립하여 월간지 《구국》을 발행하였고, 1952년에는 자유당 창당준비책임위원, 자유당 감찰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58년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냈으며, 1963년 민정당(民正黨) 전당대회의장, 1966년 신민당 운영위원장, 1971년 국민당 정무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힘썼다.

참고문헌

  • 韓國辯護士史(大韓辯護士協會, 1979)
  • 韓國法曹人大觀(法律新聞社, 1982)
  • 大韓辯護士協會誌(大韓辯護士協會, 1981). 〈朴禹東

출처: 한국학 사전

 

서울工高 70년사에 기고한 신태악 동문의 글에 의하면 3.1운동 당시 그는 한국학생 동원책임자로 동숭동 같은 구내의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에게 연락을 받고 1, 2학년 학생 10명과 함께 종로 파고다 공원에 가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일경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고 6개월 후 출감하여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활발한 반일활동을 하던 그도 일제 말에는 이광수 등 대부분 유력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친일행적을 보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위키백과에 보면 신태악 동문에 대한 다른 인물평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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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수 전 상공부장관(42회 건축)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에서 관리생활을 시작하여 상공부에서 국제협력차관보, 상역차관보,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수출 100억불 시대의 주역으로 퇴임 후에도 한강포럼을 창설하여 활발히 활동하였다.
  
상공부 전직관료들과 설악산 관광을 위해 이동 중 교통사고를 위장한 테러로 사망하였는데 당시 박 전장관은 5, 6 시절 안기부 요원의 무기거래 불법 리베이트를 인지했다는 이유와 DJ정부의 대북유화정책을 강하게 비판하여 안기부 요원들이 이를 빌미로 저질렀다는 지인들의 주장이 있으나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지 않았다.
 

 

서울

한국외국어대 영어, 미 피츠버그대 대학원 졸,

한양대 경제학 박사
상공부장관
전매청장
 국제협력차관보, 상역차관보

 한국외국어대 총장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한국소비자보호원장

 한국외대 총동문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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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인 장기범 (36회 기계)

 해방 이후 한국방송사에서 매우 비중이 높았던 방송인물로 인천(仁泉) 장기범(張基範) 선생을 꼽는데 그는 1949년 국내유일 방송으로 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에 입사하여 아나운서, 라디오와 TV제작, 보도책임자를 역임하였는데 특히 재치문답, 스무고개 등의 라디오 방송 사회자로서 명성을 날렸다.

50~60년대는 물론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70년 대 초까지 라디오방송 아나운서의 인기는 매우 높았는데 장기범을 비롯해 후배 아나운서인 이광재, 임택근 등이 그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좀 늦은 나이에 이화여대 메이퀸 출신의 박종설 여사와 결혼하여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다. (사진 좌)

 

 중앙방송(KBS)이 공보부 소속으로 정부의 부서로 인식되던 시대에 가장 비중 있는 방송인이 었던 그는 독재권력의 부당한 간섭이나 옮지 않은 일에 동조하거나 몸을 굽히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그는 정부고위직 등 높은 자리 갈 수도 있었으나 그러한 일들로 인해 오히려 인사상의 불이익을 여러 번 받았다.


그러나 그는 방송인으로서 본연의 자세를 지키고 바른 삶을 살다간 높은 인격과 덕망을 갖춘 인물로 후배 방송인들에게 각인되어 존경 받고 있다. 

   

이러한 장기범 선생의 뜻을 기리고져 한국아나운서협회에서 장기범 아나운서상을 제정하여 연말 방송대상에서 그해 가장 좋은 활동을 보여준 아나운서에게 시상하고 있다.


한국방송인물사를 연구, 집필하고 있는 후배 방송인인 김성호 박사가 첫 번째 인물로 장기범선생의 방송인생을 다룬 ≪장기범 평전, 방송이 곧 사람이다≫가 2007년 출판되었다.


이 책의 내용 중 1장 출생과 성장에 장기범 선생의 유년기와 모교 입학에 대한 내용이 자세히 적혀 있다. 
그리고 방송인 이장춘 선생이 KBS의 협조를 받아 운영하는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에 한국방송사에 대한 모든 자료가 있는데 장기범 선생 관련 글 이 많이 올려져 있다.

 

인천 무의도 출생

경성공립공업학교 졸

고려대 정치과 졸

제1회 방송문화상 보도부문 수상

미국의 소리(VOA)

중앙방송 보도부장  

KBS 라디오국장 (현 보도본부장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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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 치하에서 ‘과학기술 대중화 운동’을 주도했던 김용관 선생(6회)

 

 2017년 광복 72주년을 맞아 문재인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언급하며 넋을 기렸다.

문 대통령은 15일 오전 경축사에서 "모두가 광복을 만든 주인공"이라며 "광복은 항일의병에서 광복군까지 애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흘린 피의 대가였다. 직업도, 성별도, 나이의 구분도 없었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이 언급한 독립투사는 의사 이태준 선생과 기자 장덕준 선생, 독립운동가의 어머니 남자현 여사, 과학자 김용관 선생, 영화감독 나운규 선생이다.

[출처: 중앙일보] 대통령이 부른 독립운동가 5...의사·기자·어머니·과학자·감독

구한말 박찬익(3, 전 상해임시정부 법무부장) 선생이 한국최초의 공업연구모임인 공업연구회를 발족, 2년 여 활동하다 대한제국이 일제에 병합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에서의 과학기술에 대한 연구활동이 중단되었으나, 이후  일제강점기 선각자인 김용관(金容瓘) 선생의 주도로  과학기술의 대중화운동을 위해 1924101일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진흥단체인 조선발명협회가 창립되고 이후 과학데이 행사, 과학지식보급회 등을 조직하여 조선의 과학기술 대중화를 위해 헌신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과학데이 행사 후 일제에 체포되어 4년 여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출감 후 일제의 눈을 피해 만주로 피신, 해방 후 귀국하였으나, 과학지식대중화 운동에 헌신하느라 가장으로서 자신의 가정을 제대로 돌볼 수 없었던 그는 활동력을 상실하고 1967년 쓸쓸히 사망하였다.

매년 421일 과학의 날도 1934 419일부터 시작된 과학데이 행사를 유래로 지정되었다.

▲ 서울 생

   관립공업전습소 도기과 졸(최초의 근대적 실업교육기관, 관립농상공학교의 후신)

   경성공업전문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1회 졸(공업전습소 특별과를 기반으로 설립된 서울공대의 전신)

   일본 동경고등공업학교

과학대중화운동의 기수 김용관

기사출처:네이버 *기사내용은 링크사이트를 참고하세요.*

 

조선발명학회 발행 과학조선

기사출처:한국잡지백년2 *기사내용은 링크사이트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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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건축의 학문적 기틀을 세운 서울대 명예교수 윤장섭 박사(33회 건축)

::: 끊임없는 자기 계발로 한국 건축의 학문적 기틀을 세운 윤장섭 교수 :::

                                                                   이언구 (중앙대 건축학과 교수)  

 

흔히들 건축은 예술과 과학이 통합된 학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건축이 도시를 아름답게(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꾸미고, 인간 생활에 문화적 활력소를 제공하며, 독창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건축은 분명히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건축이 우리들에게 건강하고 안전하면서도 쾌적한 삶의 터전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학적 기술이 접목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은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이해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점에서 건축이라는 학문이야말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학제간(interdisciplinary) 성격의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이 학문으로서 교육되고 연구되어 온 역사는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매우 일천하다. 세계적으로도 19세기 중엽까지 건축은 단지 도제식(apprenticeship)의 일방적 기술 전수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고, 180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대학교육의 체제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제시대인 1916년 총독부에서 설립한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처음으로 학제화된 건축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기술 위주의 전문교육에 치중하였으므로, 해방후 1946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내에 신설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가 대학 건축교육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소우(篠愚) 윤장섭(尹張燮) 교수는 1946년 서울대 건축학과의 첫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8명 졸업)했으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건축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졸업 후 바로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하였고, 전쟁으로 이를 계속하지 못하다가 1958년 미국 MIT 건축대학원에 유학하여 1959년 석사 학위를 받았으니,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건축 분야에서 외국 유학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바로 한양대에서 시간강사를 하였고, 또 군복무 후 1955년에 한양대 교수, 1956년에 서울대 교수가 되었으니 우리나라 건축교육에 있어 선구자임이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윤장섭 교수는 이와 같이 연대기적인 선구자로 남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일흔 다섯 되던 1999년에 『중국의 건축』이라는 중국 건축 문화의 발자취를 정리한 저서를 출간하더니, 이듬해에는 다시 『일본의 건축』이라는 역저를 출간하고 있으니 말이다. 희수를 넘긴 지금도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과 학문 연구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는 윤장섭 교수가 앞으로 어떻게 후학들을 놀라게 하고 채찍질할지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다. . 학문적 토대 소우 윤장섭 교수는 192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41 5년제 관립 경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주택영단(지금의 주택공사)에서 2년간 건축기사로 근무한 후 다시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에 입학하게 된다. 건축을 공부하게 된 동기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주변에서 건강 유지를 위해 건축을 하라는 권유 때문이었다니,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규칙적으로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건강의 비결이 정말 ‘건축’에서 나온 모양이다. 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줄곧 수석을 차지했던 윤장섭 교수는 해방 후 설립된 1946년 서울대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1950년 졸업하였으니 이때까지 건축교육만 11년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그의 건축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이해는 이때의 경험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였으나 6·25의 발발로 공군에 입대하여 시설 장교로서 4년 반을 근무한 후 1955년 공군 소령으로 제대한 그는 바로 한양대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하였고 1년 뒤인 1956 11월 서울대학교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군 생활 내내 미국 유학을 꿈꾸던 윤장섭 교수는 1958 USOM 미국 파견 교육 프로그램의 주선으로 매사츄세츠 공대(MIT) 건축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때 MIT에서의 대학원 과정은 그의 건축교육과 연구 활동에 출발점이자 구심점이 되었다. Eduardo Catalino, Gyorgy Kepes, Pietro Bellushi, Lawrence Anderson 등 유명 교수와의 만남에서 얻은 교훈과 특히 당대 제일의 건축가이자 교육자인 Walter Gropius와의 만남은 그에게 일생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일생에 걸쳐 가장 큰 학문적 소재의 대상이 된 한국 건축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바로 MIT 유학 시절에 싹텄다는 사실이다. 석사과정을 통해 보고 배운 세계 각국의 건축 문화는 그 사회의 역사와 가치관과 지역 특성 및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계승 발전되었다는 인식이 그로 하여금 그동안 무관심했던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 것이다. 윤장섭 교수는 귀국 후에는 대학에서의 교육뿐만 아니라 건축 연구 활동과 함께 설계 실무에도 참여하게 된다. 1960 USOM ICA주택설계에 참여하였고, 1965년에는 건설부 주거 및 도시주택연구실(HURPI)설립을 주도하였다. 1966년에는 국회의사당 기본 계획을 주관하여 작성하였고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계획 수립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1960년부터 1974년까지 직접 설계 사무실을 개설하여 운영하면서 다양한 건축 설계의 실무 경험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응용학문으로서의 건축의 특성상 건축과 교수들은 건축 이론과 실무 경험이 겸비되는 것이 필수적이고 외국에서는 당연한 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중반부터 이를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후 윤장섭 교수는 1974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신행정수도기획단 분과위원장, 중앙도시계획위원, 대만 성공대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한 후 1980년 대한건축학회 회장, 1981년에는 학술원 회원에 선임된다. 1990년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열정적인 연구 활동과 저술 활동을 통하여 한국출판문화상, 서울시 문화상, 과학기술도서상, 옥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등의 상훈을 받기도 한 그는 현재에도 서울대 명예교수, 호서학원 감사, 문화재위원, 동우건축 고문 등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활발한 연구자문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 학문적 발자취 윤장섭 교수는 교육자이자 건축가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 계획과 설계를 가르치면서 ‘건축음향’이라는 환경기술적 전공 분야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학문적 추구는 우리의 정신세계와 자연과 전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건축문화의 계승발전이었다. 그는 1973년에 10여 년 간 수집한 자료와 연구 내용을 참고로 『한국건축사』를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주로 일본인들의 자료에 의존하던 한국 건축의 역사를 주체성과 문화적 연계성에 입각하여 체계화시킨 최초의 전문 서적이다. 이 책은 출판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도 대학 교재 및 참고도서로 가장 애용되고 있으며, 그는 이 책으로 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연이어 자신의 연구 논문을 정리한 『한국건축사연구』, 『한국의 건축』, 『건축 공간과 노자사상』, 『한국건축사론』 등의 저술을 통하여 한국 전통 건축의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는 작업을 지속하였다. 그의 한국 건축에 대한 이론적 체계 구축은 서양 건축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 전통 건축에 대한 연구활동과 병행하여 서양 건축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시대적 사회 문화의 이해로 설명하는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였고, 그 결과를 정리하여 『서양건축사』, 『서양근대건축사』, 『서양현대건축』 등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이중에서 1987년 출판된 『서양근대건축사』는 그가 학술원상을 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는 1978년이래 매년 봄가을로 학생들을 인솔하여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통 건축 답사 여행을 다니곤 했는데, 이즈음에도 연구실 제자들로 구성된 소우회 회원들과 함께 국내외의 건축 답사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연구물과 저서에 포함된 건축 자료는 대부분 그가 실제로 그렸거나 측정한 자료와 직접 찍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의 사진 실력은 전문가의 수준에 비견할 만 하다. ‘한국 건축’이 윤장섭 교수의 연구자로서의 관심의 대상이라면 ‘건축계획방법론’은 그의 건축가로서의 관심의 대상이다. 미국 유학 시절에 인상깊게 느꼈던 그들의 건축설계에 대한 합리적 접근방법을 서울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그는 『건축계획연구』, 『건축계획방법론』, 『디자이너의 사고방식』과 같은 저서를 출간하게 된다. 한국 건축과 건축계획방법론은 일견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가 『소우 수필집』에서 기술한 다음의 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 건축의 발전방향은 우리의 문화적 유산 속에 깊숙히 뿌리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현대적인 건축 표현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건축디자인의 원리에 정통해야 한다. 다음에 우리 문화유산의 장점과 단점들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며, 좋은 문화유산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계승해 나가는 방안을 계속 추구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는 현대적인 건축 과학 및 기술과 재료들에 관하여 연구하며 그 활용 방법을 통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모든 요소들을 통합화하는 프로세스를 거쳐 우리들의 특유한 현대적인 건축을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윤장섭 교수의 학문 세계에서 한가지 특기할 점은 그가 건축환경의 기술적 분야인 ‘건축음향’의 선구자라는 점이다. 그는 대학에서 ‘한국 건축’이나 혹은 ‘건축계획’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건축음향’을 20년 이상 강의하였고 『건축음향계획론』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건축음향 분야의 최초의 전문서적일 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도 이 책이 음향 분야에서 가장 내용이 충실한 책으로 자부하고 있다. 왜 그가 건축음향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설명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과거 MIT시절에 연구 과제로 파리의 그랜드오페라 하우스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건축음향에 매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간 그는 많은 건축음향에 대한 자문과 함께 석·박사 학생들의 연구 주제로 건축음향을 즐거이 택하곤 했다. . 맺는 말 윤장섭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일제시대부터 신앙생활을 해 온 터이기에 그의 일상에는 신앙적 내음이 배어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신앙적 배경은 그의 건축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건축의 목적이나 건축가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자주 성경을 인용하곤 한다. 예수가 복음을 전할 때 종종 집 짓는 일에 비유한 성경 구절은 그가 논설이나 에세이에 즐겨 쓰는 말들이다. “집과 성전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서, 집을 짓는 것은 하느님의 범례에 따라 혼돈 속에 정연하게 질서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종교적 해석에 따라 그는 항상 질서정연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을 추구해 왔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다.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늘 존대하면서 조용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고전에서 보는 군자의 모습이다. 윤장섭 교수에게는 그가 ‘한국건축사’를 전공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복과 전통차가 꼭 어울린다. 설날 같은 때 제자들이 세배라도 가면 항상 한복으로 차려입고 조용히 차를 격조 있게 대접하는 그를 볼 때 우아한 자태의 전통 한옥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아마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 가져온 곳 : 대학교육 제 114 | 20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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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1 7일 서울 출생, 본관은 남원(南原), 아호는 소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

미국 MIT 건축대학원 건축학과 졸

공학박사

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교수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 상임위원

대학건축학회 회장, 명예회장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및 제1분과위원장

()종합건축사사무소 동우건축 고문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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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영 전 한양대 부총장(35회 전기)

 

이만영 박사는 정보통신 정보보호분야의 암호학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석학이다.

컴퓨터나 인터넷이 우리 일상에 가까이 자리 잡은 지 불과 10년 전후인데, 이만영 박사는 1950년 대에 벌써 이런 학문을 연구하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만영 박사는 플브라이트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콜로라도대에서 서울공대 출신으로는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 후,  미국 보잉사 엔지니어로 근무하였다. 이후 한양대 교수,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70년대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 신설된 국방과학연구소의 초대 부소장으로  이후 삼성전자 반도체, 통신부문의 전신인 삼성반도체통신() 초대 대표이사를 역임 후 한양대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1962년 국내 최초로 아날로그컴퓨터를 제작한 바 있는데 제1,2 호기는 화재로 소실되고 제3호기가 한양대기념관에 보존, 전시되어 있다.

 

한양대 부총장을 끝으로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 초빙교수, 경희대 석좌교수로 강단에 섰다..

 

2010년에는 과학자들이 일생에 한 권의 책만 내도 큰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권위가 있는 세계적 출판사인 미국의 존 와일리가 통신보안시스템 분야의 ‘글로벌 최고 베스트셀러’로  이만영 박사의 저서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보안’을 선정한 바 있다. 이 책은 3세대(3G) 이동통신을 중심으로 세대별 무선 이동통신시스템의 진화 과정과 구조, 동작원리, 음성, 고속패킷데이터 전송서비스 등에 대해 소개하면서 무선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기술 개발 및 다양한 보안문제 대처방안 등을 다뤘다.

 

올해 86세인 이만영박사는 존 와일리, 맥 그로-, 프렌티스 홀 등과 같은 세계적인 출판사에서 5권의 전문서적을 출판했는데 이는 한국 과학자로서 처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책을 쓸 때 세계인이 다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문 저술만 고집하였다한다.

 

주요저서 : 《오류정정부호이론》《암호이론》《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보안》등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학사(52)

University of Colorado 공학박사(58)

Virginia 주립대학교 공대 교수(64)

삼성반도체통신 대표이사 사장(77)

한양대학교 교수, 부총장, 명예교수(82~현재)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초빙교수(98~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현재)

한국공학한림원 명예회원(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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