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도 동문소식

from 동문소식 2011. 1. 21. 22:29

우지형( 28회 방직)   단국대 섬유공학과 명예교수 별세

김병규(35회 기계)  전 성균관대 공과대학장 별세

이원식( 37회 응용화학)   서울대 화학교육과 명예교수 별세


리영희(38회 전기)    전 한양대 교수 별세

용태영(40회 전기)   변호사 별세

최경훈(60회        )   (주)예스코 대표이사 → 고문


장만석(64회 토목)   국토해양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 → 수자원정책실장 


장인환(65회 기계공작)   포스코 전무 → 포스틸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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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교 전경(출처 : 이수영과 사진)

 

 1939  모교의 전신인 京城公立工業學校 본관으로 건축된 서울공고 본관은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등록문화재 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또한 현재 위치로 이전,합병하기 전 서울 동숭동의 官立京城工業學校 본관(현 한국방송대 별관)

사적 제27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어 서울공고의 교사와 교사 모두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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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故 리영희(李泳禧)(38회 전기)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까닭에, 그것을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1977> 머리말에서 

 

 

“인간은 누구나, 더욱이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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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학자.

 

리영희는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잠시 경북 안동고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을 맞아 연락장교로서 7년간의 군복무(육군 소령으로 예편)를 마쳤다. 1957년부터 1971년까지 15년 동안 〈합동통신사〉와 〈조선일보사〉에서 일한 다음 1972년부터 1995년까지 한양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가 1964년 아시아-아프리카(AA) 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조선일보〉에 쓰자 박정희 정권은 그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후 3선 개헌 및 10월유신 등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베트남 전쟁 파병과 국내의 민주헌정 파괴 및 사회정의 후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지식인의 집단적 선언활동에 참여했다. 1971년의 '위수령 발동 항의 시국선언', 1974년의 '민주회복 국민선언' 등이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대표적 선언활동이다.

 

언론인 혹은 비평가로서 그의 영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에 대한 정권의 탄압은 심해져 그는 여러 차례의 옥고를 치렀다. 리영희와 시인 김지하의 투옥은 한국의 인권상황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사건이었다. 그는 1977년 자신의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이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금고형을 받은 것을 비롯해, 1984년 '국정교과서 내용 중 민족분열-반통일 지향 부분을 분석 조사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다시 1989년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 기획에 참여한 것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반년간 투옥되었다.

 

리영희는 2000년 4월 〈신문의 날〉을 맞아 한국기자협회가 행한 조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존경하는 기자로 리영희가 뽑혔다. 리영희는 저널리즘, 대학 강단, 그리고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의 정의감 혹은 양심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새겨져 있다. 1999년 12월 〈동굴 속의 독백〉을 펴냈고, 그밖의 저서로는 〈반세기의 신화〉(2000), 〈대화〉(2005), 〈리영희저작집〉(12권, 2006) 등이 있다. 리영희는 2000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투병 생활을 해오다가 지병의 악화로 사망하여 광주 5·18민주묘역에 안장되었다. 2007년 약 6개월에 걸쳐 후배 언론인 김삼웅이 인터뷰하여 집필한 〈리영희 평전〉이 사후인 2010년 12월 10일 출간되었다. 늦봄통일상(1999), 만해상(2000), 심산상(2006), 단재언론상(2006), 한겨레통일문화상(2007) 등을 수상했다.

 

◈ 기사출처 : "리영희"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2011. 1. 30자 기사]

평북 삭주 출생
     京城公立工業學校(모교 전신) 졸
     국립한국해양대1회 졸                                    
     미국 노스웨스턴대 신문대학원 (풀브라이트 장학생)          
     연합통신, 조선일보 외신부장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미국 UC 버클리 아시아학과 초빙교수
     한겨레신문 이사 및 논설고문

 

저서 : 《전환시대의 논리》《자유인》《8억인과의 대화》《우상과 이성》《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   다》, 《역정》 등.      이밖에 후학들이 쓴 《리영희평전》《리영희프리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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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1899년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해  국내 최초의 실업교육기관으로서 工科 위주의 4년제 관립상공학교로 설립, 1904년 관립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으나 ,예산부족과 일제의 국권 침탈이 본격화되는 등의 혼란으로 명맥만을 유지하다, 1906년 공과는 조선 최초의 근대적 최고공업교육기관인 관립공업전습소로 개편되어 남고,  농과는 수원고등농림학교( 서울대 농생명과학대), 상과는 선린상업학교( 선린인터넥고)로 분리되어 나갔다.

 

1914년 관립공업전습소 특별과가 설립되어 1916년 설립된 경성공업전문학교(이후 경성고등공업학교, 다시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해방 후 서울공대로 통합됨) 1회 입학생이 되고, 1916년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신설 되며 이에 부속된다,

 

이후 1922년 관립경성공업학교로 개편, 1939년 동숭동에서 대방동으로 이전, 경성공립공업학교, 서울공립공업중학교, 서울공업고등학교,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 다시 서울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이 환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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