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수(金若水) 제헌의회 초대 국회부의장


본관은 김해. 본명은 김두전(金枓栓)이며, 이명은 김두희(金枓熙). 아버지는 김은홍이다.


활동 사항

김약수(金若水)[1890~1964] 1890 10 21일에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240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의열단 김원봉(金元鳳) 단장이 물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의미로 약수(若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김약수는 휘문의숙을 거쳐 1914년 관립경성공업전습소 응용화학과[각주:1]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다니다가 1915 12월 중퇴하였다.

귀국 후 고향 기장에서 기장광복회 회장을 맡는 등 독립 운동에 투신하다가, 1918년 국외에서 독립 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김원봉·이여성(李如星) 등과 함께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재학 중 조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 활동을 위해 이여성과 함께 1920년 다시 귀국하였다. 1920 9월 박중화(朴重華)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창설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 적을 두고 1921 11월 무정부주의자 박열(朴烈) 등과 함께 북성회를 조직하였고, 조선고학생동우회 등에 관여하다가 1922년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사회주의 단체 북풍회(北風會)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국내에 잠입한 정재달과 접촉하여 구금되기도 하였다. 1924 4월 조선노동총동맹 및 조선청년총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였고, 1925년 제1차 조선 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해 1926 12월 대구에서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았으나, 1932 10월까지 복역하였다.

김약수는 만주 사변 후 『대중』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으나 내용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일제 경찰들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구금하고 탄압하는 바람에 폐간되었고,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에 불응하여 여러 번 구금을 당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여 일제 강점기에 총 9 7개월 동안이나 형무소에 갇혔다.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간부로 선출되었으나, 건국준비위원회의 좌경화와 조선인민공화국으로의 개편에 반대하면서 좌익 진영을 이탈하여 한국민주당의 조직 부장을 맡았다. 그러나 1946 10월 다시 한국민주당을 탈당하였고 김규식과 함께 민중동맹의 창설에 참여하여 상임 위원을 맡으며 중간파 노선을 취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지명되어 활동하였고, 1947 5월 민중동맹에서 탈퇴해 조선공화당을 창당하여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매진하였던 좌우 합작 운동이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로 1947 12월에 해체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단독 정부 수립이 가시화되자, 김약수 역시 현실적인 노선으로 선회하여 단독 정부 수립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8
5·10 총선 때 동래[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제헌 의원에 당선,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었다. 국회에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정책에 반대하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소장파 의원의 지도적 구실을 하였으며 1949 6월 남로당 국회 프락치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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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전쟁 중 월북하여 1955년 북한의 인민경제대학 특설반에 입교하였고,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 겸 집행 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959년 숙청되어 평안북도 벽지로 추방되었다. 1964 1 10일에 사망하였다.


▣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울工高 연혁

 1899. 5

 고종황제 칙령에 의해 4년제 官立商工學校 설립( 중구 명동)

 1904. 6

 4년제 官立農商工學校로 개편( 종로구 수송동 제용감 자리)

 1906. 4

 官立農商工學校의 工科는 官立工業傳習所( 종로구 동숭동),

 農科는 수원고등농림학교(現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 商科는 선린상업학교(現선린인터넷고) 분리

 1914.

 官立工業傳習所 특별과 설립(1916 신설된 京城工業專門學校의 전신)

 1916. 6

 관립공업전습소가 신설된 京城工業專門學校(京城高等工業學校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부속되고,  

 양교 교장을 중앙시험소(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소장이 겸임

 1922. 4

 官立京城工業學校(3년제) 개편

 1939. 6

 동작구 대방동 교사로 이전

 1940. 4

 京城公立工業學校(5년제) 개편 

 

 서울公立工業中學校(6년제) 개편

 1978. 3

 서울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 변경

 1979. 5

 「한국실업교육의 발상지」기념비 건립

 1994. 1

 서울공업고등학교로 교명 환원

 1999. 5

 개교 100주년


  1. 서울공고 연혁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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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신문 [중기인 한마디]

김대구 공간정밀 사장, 가족 대부분 공고 출신…"실업계서 기술인력 더 키워내야"

 

 “산업현장의 기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실업계 고등학교를 늘리고 지원을 확대해야 합니다.”

 

서울 신도림동에 있는 공간정밀의 김대구 사장(54·사진)의 제안이다. 그의 가족은 대부분 서울공고 출신이다. 김 사장과 아들은 서울공고 정밀기계과를 나왔고 딸도 같은 과를 다니고 있다.

 

그가 자녀까지 공고를 보낸 데는 이유가 있다. “제조업이 발전하려면 숙련 기술자가 많이 필요한데 실업계고 졸업생이 이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공과대학 출신은 주로 관리자 역할을 하는데 관리자만 많아선 좋은 품질의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공간정밀은 직원 11명의 소기업이지만 특수금속 가공 실력은 국내 정상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반도체검사장비 부품을 생산한다. 이 부품은 원통 모양의 특수강을 두께 6㎜ 원판으로 가공한 뒤 전체 평면의 오차를 20마이크로미터() 이내로 가공한다. 일본 미쓰비시가 납품하던 발전소 부품도 국산화했다.

 

이 회사가 개발 중인 비메모리 반도체 검사용 장비 부품은 불과 4㎠의 평면 안에 수천개의 미세한 구멍이 뚫려 있다. 각각의 구멍에는 미세한 핀이 부착된다. 이 제품 역시 구멍 간의 정확한 간격이 생명이다.

 김 사장은정밀가공 기술이 없으면 반도체, 로봇, 공장자동화 등 수많은 첨단산업이 존재할 수 없다첨단산업을 구현하는 밑바탕을 이루는 게 바로 현장의 숙련 인력이라고 설명했다.

 

김 사장은우리가 학교에 다닐 때는 전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공고로 몰려왔다지금은 실업계고가 턱없이 적고 인력도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각종 정밀부품을 가공해야 할 중소기업이 만성적인 생산인력 부족에 허덕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사장은실업계 고등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고 공부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센티브를 줘야 이들을 산업역군으로 키울 수 있고 국가 경쟁력도 높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2017-03-01 김낙훈 중소기업전문기자


  가져온 곳 : 한국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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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대순 전 한양대 산업미술대학장(40)

 

작성 중~

서울대 미대

한양대 산업미술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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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주 러시아 한국문화원장을 지낸 유민 박사의 기사가 있어 올립니다.

유민 키르기즈국제대학(KUIC) 학장키르기즈국제대(KUIC) 학장

"도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인생 2막의 꿈꿔야"

▣ 가져온 곳 : 아세아경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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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의 변신'…첨단 신제품 개발 중심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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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전 성균관대 공과대학장(35회 기계)


▲ 서울대 공대 화학공학

    성균관대 공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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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용(43세)

from 동문소식 2016. 12. 18. 12:37

▣ 가져온 곳: 네이버>Job&>초6까지 글 제대로 못 읽던 아이, 박사학위급 기술사 4개 가진 군무원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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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희생 '감사'...서울공고 6.25 참전 유공자 명비 세워져

66년 전, 1950 6.25 전쟁 당시 서울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학도병과 국군으로 입대해 대한민국을 지켰습니다. 서울남부보훈지청이 그 공훈을 기리기 위해, 서울공고에 '6.25 참전 유공자 명비'를 세웠습니다. 보도에 유수완 기자입니다.

1950년 서울공고 6학년에 재학중이던 김락제 할아버지.

66년 전 6.25 전쟁이 발발하고, 19살의 나이로 학도병에 자원입대합니다.

 

 [인터뷰: 김락제 / 서울공고 42 (85) ]

"1950 6 27일 새벽에 한강 인도교가 폭파돼 한강 북쪽에 있었던 사람들은 완전히 길이 묶였던 것이지. 그런 동안에 학도병이라는 제도가 생겨서, 우리 서울공고 42, 43회들이 학도병 출신으로 군에 가서 (전쟁터에서 싸웠지)."

 재학생은 학도호국단으로, 졸업생은 국군에 입대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6.25 참전 선배들의 희생과 공훈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나섰습니다.

서울남부보훈지청은 서울공고, 총동문회와 함께 6.25 전쟁에 참전한 선배 201분의 이름을 새겨 학교 뜰에 세웠습니다.

 

[현장음: 윤종오 / 서울남부보훈지청장 ]

"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신 서울공고 참전용사께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자신과 친구 이름이 비에 새겨지고 그 명비가 모교에 세워지는 것을 보는 감회는 남다릅니다.

 

 [인터뷰: 김락제 / 서울공고 42 (85) ]

"아주 감회가 깊어요. 학교에서 6.25 전쟁 때 1950년에 만난 친구들인데..."

 서울공고 후배들과 학교 교직원은 선배들의 숭고한 희생 정신에 감사해 하고, 영원히 기억할 것을 약속합니다.

 [인터뷰: 윤영민 / 서울공고 1학년 ]

"(선배님들이) 저희 나이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주셔서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장음: 양한석 / 서울공업고등학교장 ]

"6.25 전쟁에 참전해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신 대 선배님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이어가겠습니다."

 

118년 역사 한국 실업교육의 발상지, 서울공업고등학교.

'서울공고 6.25 참전 유공자 명비'는 애국심의 표상으로 자리하며, 후학들의 곁에 남게 됐습니다.

 

[현장음]

나라사랑! 서울공고!

 

HCN뉴스 유수완입니다.

[출처] 숭고한 희생 '감사'...서울공고 6.25 유공자 명비 세워져 - 현대HCN|작성자 뉴스와이드




  지난 7월 모교 교정에서 6.25 참전유공자 201명의 명비가 제막되었다. 그 동안 모교위상 저하로

동창회의 활동이 거의 없어 이러한 사업을 추진할 수 없었으나 국가보훈처 서울남부보훈지청의 주도로 결실을 보게 되었다.


 서울고의 경우 이미 80년대에 동창회 주도로 6.25참전 동문들을 적극 발굴하여 참전자 명비 등을 세우고, 조국수호를 위해 참전한 당시 서울중 출신의 학도병 전사자수가 전국 중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내었음을 긍지로 삼고 있다. 그러나 실제 기록상으로는 국군모병소가 있던 군산의 군산중이 63명으로 제일 많은 희생자를 냈고, 서울중은 8번째로 30명으로 확인되었다.

당시 무명전물학도병수가 많아 정확한 학교별 전사자 정보로는 볼 수 없다.


그러나 모교는 당시 동문과 재학생들의 참전자수는 물론 전사자수도 파악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6.25 발발 후 서울 유일의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7~8년 간 왕래가 불가능하여 강북지역의 재학생들이 모교와 연락이 단절되고, 전후 다수의 재학생들이 타교로 편입한 것도 정확한 참전자수와 전사자 수를 가늠할 수 없는 요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수복 후 용산중에 주둔 중인 7사단 18포병대에서 신병 모집 시 모교인 서울공업중 학생이 25명 선발되어 참전하였다는 참전비가 용산고에 건립되어 있다.


이번에 건립된 서울공고 6.25 유공자 명비에 이들 참전학도들의 이름이 들어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추후 모교에서도 동창회 주도로 동문들의 정확한 참전자수와 전몰학도수를 파악하여 후학들에게 남겨 주어야 할 것이다.

▣ 참고 : 母校와 고향마다 6.25 전사자 기녑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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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희래 전 이화여대 의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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