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태영 변호사는 1945년 8.15 해방 후 당시 재학생 명부에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약 60~70%에 이르는 일인 학생들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편입 시 3학년으로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모교70년사에 따르면 이 시기 사회는 물론 교내에서도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고, 기존 경공 재학생들도 이런 분위기와
편입생들과의 괴리감 등으로 많이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용태영 변호사는 2년 여를 다니다 4학년 정도에 중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상 졸업 시 40회로 이는 마찬가지로 중퇴 후 경복중학교로 옮겨 졸업한 류택형 변호사와 같은 시기에 재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류택형 변호사는 서울법대 졸업 후 고시 8회 수석, 행시합격으로 당시 최초의 고시2관왕으로
현재도 법조원로자문회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용태영 변호사는 2년 전 작고 시까지도 변협 원로자문회의 공동대표를 류택형변호사와 함께 맡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경공 동창으로 두분이 끈끈한 우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 경기 수원
서울공립공업중학교(해방 이후에도 상당 기간 경성공립공업학교의 약칭인 京工 불리웠음) 중퇴
육사10기
고등고시 사법과 10회
수도변호사회 회장,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헌변) 부회장
변협 원로자문회의 공동대표
▷관련 글 ; 글 쓰신 분 : 《1996년 동아일보. 이수형 기자》
이마로 도끼 까며 내식대로 살았소
회고록 첫권 「황야의 노방초」낸 용태영변호사, 법조 40년 奇人 같은 삶 반추
천하의 영재들이 모이는 법조계에는 그만큼 기인(奇人)들도 많았다. 일제시대 사흘 낮밤을 고민하다 처자가 잠든 사이 출가해 고승 효봉이 된 이찬형 판사, 말술을 마시고 대취하면 늘 천년 전의 몽골가곡을 부르던 김사룡 검사장, 자유당시절 전화교환원이 전화를 늦게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을 했던 서병균 대구고검차장 등은 법조계의 전설 같은 기인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같은 법조계의 기인들이 사라지고 없다. 대부분의 검사 판사 변호사들이
오로지 법」과 「기준」 만을 내세운다. 틀에 맞춘 규격품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세상의 「정의」는 있을지 몰라도 인생의 「멋」은 없다.
용태영(龍太暎·68)변호사는 「법조계 최후의 기인(奇人)」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법조인으로서 「기준」에 가장 가까이 살면서도 늘 그 「기준」을 벗어나 살아왔다. 이런 그를 보고 법조후배이면서 시인인 김동현(金洞玄)변호사는 『용변호사는 단순한 기인이 아니라 기이인(奇異人)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용변호사는 11월26일 자신의 「기행」(奇行)을 총결산하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회고록의 이름은 「황야(荒野)의 노방초(路傍草)Ⅰ」
이 책은 여느 회고록과는 다르다. 책 이름도 예사롭지 않고 용 한마리가 꿈틀거리는 표지도 독특하다. 언뜻 보면 중국의 무협지 같다. 내용도 특이하다. 용변호사 자신도 「법조계의 삼국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책의 내용은 허구가 아니며 모두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날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출판기념회에는 용변호사와 고시 동기인 신한국당 이회창 고문 등이 나와 축사를 해주었다.
용변호사는 회고록 집필작업을 계속해 2000년까지 전 7권으로 된 「사상 최장(最長)의」 회고록을 완간할 계획이다.
그는 『회고록 2권은 이미 탈고했고 나머지 3∼7권의 목차도 다 정해놓았다』고 말했다. 회고록의 「총론」에 해당하는 1권에는 중졸의 학력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해 수도변호사회 회장이 되고 「안민당」 총재가 되어 대통령후보로 추대되기까지의 파란 많은 인생역정이 기록되어있다.
용변호사는 『길가에 이름없이 피어 사람과 짐승에게 짓밟히고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노방초」가 나의 삶과 비슷해 회고록 제목을 「황야의 노방초」로 지었다』고 했다.
용변호사의 평생 신조(信條)는 『이마로 도끼를 깐다』는 것이다. 그는 변호사 초창기시절 거대 종교단체를 상대로 소송을 한 일이 있다. 그 종교단체의 신도가 용변호사의 소송에 불만을 품고 『도끼로 이마를 까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그렇다면 나는 이마로 도끼를 까겠다』고 응수했다. 그는 이 때부터 이마로 도끼를 까는 것을 신조로 삼아왔다.
용변호사는 실제로 「이마로 도끼를 까」 승리한 일이 있다. 용변호사는 73년 3월 정부를 상대로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해달라는「석탄일 공휴권 확인청구소송」 (행정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그것이 무슨 소송거리가 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고등법원의 판사들도 『소송요건이 안된다』며 각하하려는 분위기였다.
용변호사는 「물귀신 작전」을 썼다. 그는『그러면 국교(國敎)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며 크리스마스를 공휴일에서 제외하라는 소송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용변호사의 이같은 「고집」에 정부도 손을 들고 75년부터 석탄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의 덕택에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명예」를 회복했고 국민들은 공휴일을 하루 더 얻었다.
서울 구의동에 있는 조계종 산하 영화사(永華寺)는 그의 공로를 기려 「석탄일 공휴제정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또 태고종측에서는 『용변호사가 불교계의 30년 한을 풀어주었다』며 그에게 「화세」(華世·현실세계의 극락을 의미하는 龍華世界를 줄인 말)라는 호(號)를 지어주었다.
중학 2년 자퇴… 고시 모범답안 400개 달달 외워 합격
용변호사는 1928년 경기도 수원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경공(京工·지금의 서울공고)을 2년 다니다 자퇴했다. 그는 50년 군에 입대해 6·25전쟁을 치른 뒤 제대했다. 제대 후 아무 직업도 없이 방황하다 54년 무렵 청산(靑山) 백운학이라는 운명철학자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청산은 그를 보고 『법조인이 될 관상을 지녔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난생 들어보지도 못했던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55년말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자도 제대로 모르는 처지에 고등고시 공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 일제시대부터 치러진 고등고시 시험문제의 모범답안 400개를 구해 200여일 동안 모조리 외워버렸다. 그는 56년 7월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처음으로 응시했고, 바로 합격했다.
그는 이듬해 8월부터 동기생들과 함께 대구에서 검사시보 생활을 시작했다. 용시보는 출근은 열심히 했다. 그러나 퇴근후가 문제였다. 그는 선배 검사와 판사들을 따라 거의 매일 술을 퍼마셨다. 그는 『마시고 또 마시며, 놀고 또 놀았다』고 당시의 생활을 말했다.
처음에는 검사들을 따라다니며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는 검사들을 데리고 다니며 술을 마셨다. 대구 유흥가에서는 「용시보 거리」도생겨났다. 이런 그를 보고 고시 동기였던 김석휘검사(전 검찰총장·법무부장관)는 「천하의 용태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법조계에서는 지금도 그를 「천하의 용태영」으로 부른다.
술값은 전부 외상으로 했다. 월말이 되면 술값청구서가 수북히 쌓였다. 그는 대구시내 3개 경찰서의 계장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만해도 검사의 위세가 대단한 때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외상술값 전표를 한더미씩 그들에게 안겼다. 용변호사는 『그렇게 해서 관폐(官弊)를 끼치기는 했지만 민폐(民弊)는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시보를 마치고 검사를 지원했지만 임관되지 못했다. 그를 잘 아는 한 변호사는 『용씨가 시보시절 술을 마시다 경찰관이 불심검문을 하자 「아랫 ×들에게 손으로 신분증을 내밀 수 없다」며 시보신분증을 발가락에 끼워 보여준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임관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이에 대해 『좀 과장된 이야기다. 그러나 경찰관들이 청와대에 진정을 하는 바람에 임용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81년 1월 「보국안민」(保國安民)을 내세우며「안민당」을 창당하고 스스로 당총재겸 대통령후보 자리에 올랐다. 그는 『창당 다음달 제12대 대통령 선거 (간접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전두환 군사정권의 방해로 후보등록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그 이후 정치에서 손을 뗐으며 92년부터는 「대일(對日) 민족소송」 단장으로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의 법률구조를 해오고 있다.
한 원로 변호사는 『요즘 법조인 중에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기인(寄人)들이 많다. 그러나 용변호사는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을 자유롭게 살아온 진정한 기인(奇人)이다』고 말했다. 또 후배 변호사는 『용변호사를 「훌륭한」 법조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필요한」법조인이다』고 말했다.
▶ 자서전 황야의 노방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