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우 서울샤프중공업㈜ 회장

 

 농사꾼 집안의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연고 하나 없는 서울로 단돈 3000원을 가지고 혼자 상경했다. 

 

시장 심부름부터 건어물가게 점원, 신문배달, 미역행상 등 이것저것 다 해 본 그는 늘 부족했지만 언젠가는 사업을 할 것이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서울공고-한양대 공대-KAIST를 거쳐 81년 환경산업에 처음으로 뛰어들었다.                                                          

 

서울샤프중공업(주)은  국내 탈황설비시장의 95% 이상을 점유할 정도로 에너지·환경분야를 대표하는 중견기업으로서 독보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일본, 중국 등으로의 플랜트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 참고 : 공주 세광교회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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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8일 이의준 광주전남지방중소기업청 청장이 한국벤처캐피탈협회

상근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부회장은 중소기업청 소상공인정책국장, 광주전남지방중소기업청장 등을

 역임하며 중소기업 지원 전문가로 활동하였으며, 작년 12월에 4만㎞ 이상의

 현장을 누비면서 광주·전남의 산천과 문화·예술을 직접 경험하고, 지역리더와

 언론인, 경제인과 청년들을 만나면서 광주 전남이 나가야 할 길을 전문가적 시각으로 제시한 남도경제 블루오션이라는 책도 출간한바 있다.

 

홍익대 기계공학

버밍엄대 대학원

연세대 대학원 기술경영학 박사

 

▣ 가져온 곳 : ① 여수서초등학교 66회 동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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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석 (주)팬엔터테인먼트 회장(67회)

 

 

 

 

 박영석 회장이 이끄는 ㈜팬엔터테인먼트는 1998년 음반기획사로 출발하였으나, 이후 한류 확산의 기폭제가 된 겨울연가를 비롯해 찬란한 유산, 해품달, 세계테마기행 등 히트 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이며 국내 최고의 드라마 제작사로서 우수 콘텐츠를 공급하여 드라마 한류를 이끌어 왔다.

 

박영석 회장은 전세계에 지속적인 우수 콘텐츠를 공급하여 드라마의 해외 수출 활성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2011년 무역의 날 문화영상부문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한편 2012년 상암동글로벌미디어콘텐츠센터더팬의 신사옥으로 이전한 ㈜팬엔터테인먼트는 대형엔터테인먼트사로서  드라마, 예능교양, OST, 매니지먼트 등을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구축, 글로벌 종합미디어 그룹으로 도약해 나아가고 있다.

 

상암DMC의 랜드마크 타워인 더팬은 디지털미디어시티역 9번 출구역 근처로 맛집이 많아 외식코스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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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준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 회장(69회)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의 창업자이자 전 회장인 이상준 동문이 식도암 수술 후 제주에 정착, 그룹 소유인 선린지리조트에서 귀농학교와 제주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평범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베트남 리왕조의 마지막 왕자로 고려에 정착한 이용상이 시조인 화산 이씨 후손으로 지금도 베트남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으며 한베재단에 사재 85억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공대 재학 시절 노동운동에 투신, 노동자로서 7~8년 간 노동운동을 하였고,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소멸 후 사회주의의 모순에 환멸을 느끼고 ,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7번쨰 창업한 철거전문회사 조차도 97년 금융 위기 시 도산 후, 대학 후배인 김영선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구조조정과 M&A 전문기업으로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을 창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지금은 일신상의 이유로 고문으로 물러나 대주주로써 경영에 관한 조언만을 하고 있다.

 

그는 2005년 우리사회의 갈등원인과 해소방안에 관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비평가가 많은 사회는 망하고, 작가가 많은 사회는 발전한다는 의미 깊은 말을 남겼다.

 

아마 요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 타성에 젖은 공직사회, 현실적인 대안제시 없는 거친 언행으로 무조건적인 비판만을 가하는 이들에 대해 침묵하는 다수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준 전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회장의 쾌유와 제주에서의 행복한 삶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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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비발디  현을 위한 협주곡 G장조 작품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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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9.23일자 중앙일보가

탐사기획으로 분석한 "한국사회 파워엘리트 대해부" 특집의 고교별 파워 엘리트 배출순위에서

 

상위권 실업고 중 공업고 보다는 학력차별이 상대적으로 적고, 70년대 경제발전에 따른 금융산업의 발전으로 여러모로 유리한 상업고의 순위가 전반적으로 높고, 서울보다는 정치적인 혜택을 많이 받는 영남권 상업고들이 앞서 있다.

공업고 중에는 모교인 서울공고가 단연 1위이나 인문고로 치면 15~20위권 전후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60년대생 이후 실업고는 순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췼다.

완벽한 조사는 아니겠지만 50년 이전 생에서 경기상고와 선린상고가 덕수상고에 비해 너무 순위가 낮게 나왔다.

  가져온 곳 : 중앙일보 "한국사회 파워엘리트 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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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용태영 변호사

from 인물사(史) 2014. 5. 17. 09:21

 ▣ 故 용태영 변호사

 

 용태영 변호사는 1945 8.15 해방 후 당시 재학생 명부에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약 60~70%에 이르는 일인 학생들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편입 시 3학년으로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모교70년사에 따르면 이 시기 사회는 물론 교내에서도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고,  기존 경공 재학생들도 이런 분위기와

 편입생들과의 괴리감 등으로 많이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용태영 변호사는 2년 여를 다니다 4학년 정도에 중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상 졸업 시 40회로 이는 마찬가지로 중퇴 후 경복중학교로 옮겨 졸업한 류택형 변호사와 같은 시기에 재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류택형 변호사는 서울법대 졸업 후 고시 8회 수석, 행시합격으로 당시 최초의 고시2관왕으로

현재도 법조원로자문회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용태영 변호사는 2년 전 작고 시까지도 변협 원로자문회의 공동대표를 류택형변호사와 함께 맡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경공 동창으로 두분이 끈끈한 우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 경기 수원

    서울공립공업중학교(해방 이후에도 상당 기간 경성공립공업학교의 약칭인 京工 불리웠음) 중퇴

    육사10

    고등고시 사법과 10

    수도변호사회 회장,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헌변) 부회장

    변협 원로자문회의 공동대표

 


▷관련 글 ; 글 쓰신 분 : 1996년 동아일보. 이수형 기자

 

이마로 도끼 까며 내식대로 살았소

 회고록 첫권 「황야의 노방초」낸 용태영변호사, 법조 40奇人 같은 삶 반추

 

천하의 영재들이 모이는 법조계에는 그만큼 기인(奇人)들도 많았다. 일제시대 사흘 낮밤을 고민하다 처자가 잠든 사이 출가해 고승 효봉이 된 이찬형 판사, 말술을 마시고 대취하면 늘 천년 전의 몽골가곡을 부르던 김사룡 검사장, 자유당시절 전화교환원이 전화를 늦게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을 했던 서병균 대구고검차장 등은 법조계의 전설 같은 기인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같은 법조계의 기인들이 사라지고 없다. 대부분의 검사 판사 변호사들이

오로지 법」과 「기준」 만을 내세운다. 틀에 맞춘 규격품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세상의 「정의」는 있을지 몰라도 인생의 「멋」은 없다.

 

용태영(龍太暎·68)변호사는 「법조계 최후의 기인(奇人)」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법조인으로서 「기준」에 가장 가까이 살면서도 늘 그 「기준」을 벗어나 살아왔다. 이런 그를 보고 법조후배이면서 시인인 김동현(金洞玄)변호사는 『용변호사는 단순한 기인이 아니라 기이인(奇異人)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용변호사는 1126일 자신의 「기행」(奇行)을 총결산하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회고록의 이름은 「황야(荒野)의 노방초(路傍草)Ⅰ

이 책은 여느 회고록과는 다르다. 책 이름도 예사롭지 않고 용 한마리가 꿈틀거리는 표지도 독특하다. 언뜻 보면 중국의 무협지 같다. 내용도 특이하다. 용변호사 자신도 「법조계의 삼국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책의 내용은 허구가 아니며 모두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날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출판기념회에는 용변호사와 고시 동기인 신한국당 이회창 고문 등이 나와 축사를 해주었다.

 

용변호사는 회고록 집필작업을 계속해 2000년까지 전 7권으로 된 「사상 최장(最長)의」 회고록을 완간할 계획이다.

 

그는 『회고록 2권은 이미 탈고했고 나머지 3∼7권의 목차도 다 정해놓았다』고 말했다. 회고록의 「총론」에 해당하는 1권에는 중졸의 학력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해 수도변호사회 회장이 되고 「안민당」 총재가 되어 대통령후보로 추대되기까지의 파란 많은 인생역정이 기록되어있다.

 

용변호사는 『길가에 이름없이 피어 사람과 짐승에게 짓밟히고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노방초」가 나의 삶과 비슷해 회고록 제목을 「황야의 노방초」로 지었다』고 했다.

 

용변호사의 평생 신조(信條)는 『이마로 도끼를 깐다』는 것이다. 그는 변호사 초창기시절 거대 종교단체를 상대로 소송을 한 일이 있다. 그 종교단체의 신도가 용변호사의 소송에 불만을 품고 『도끼로 이마를 까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그렇다면 나는 이마로 도끼를 까겠다』고 응수했다. 그는 이 때부터 이마로 도끼를 까는 것을 신조로 삼아왔다.

 

용변호사는 실제로 「이마로 도끼를 까」 승리한 일이 있다. 용변호사는 73 3월 정부를 상대로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해달라는「석탄일 공휴권 확인청구소송」 (행정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그것이 무슨 소송거리가 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고등법원의 판사들도 『소송요건이 안된다』며 각하하려는 분위기였다.

 

용변호사는 「물귀신 작전」을 썼다. 그는『그러면 국교(國敎)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며 크리스마스를 공휴일에서 제외하라는 소송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용변호사의 이같은 「고집」에 정부도 손을 들고 75년부터 석탄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의 덕택에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명예」를 회복했고 국민들은 공휴일을 하루 더 얻었다.

 

서울 구의동에 있는 조계종 산하 영화사(永華寺)는 그의 공로를 기려 「석탄일 공휴제정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또 태고종측에서는 『용변호사가 불교계의 30년 한을 풀어주었다』며 그에게 「화세」(華世·현실세계의 극락을 의미하는 龍華世界 줄인 말)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중학 2년 자퇴고시 모범답안 400개 달달 외워 합격

 

용변호사는 1928년 경기도 수원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경공(京工·지금의 서울공고) 2년 다니다 자퇴했다. 그는 50년 군에 입대해 6·25전쟁을 치른 뒤 제대했다. 제대 후 아무 직업도 없이 방황하다 54년 무렵 청산(靑山) 백운학이라는 운명철학자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청산은 그를 보고 『법조인이 될 관상을 지녔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난생 들어보지도 못했던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55년말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자도 제대로 모르는 처지에 고등고시 공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 일제시대부터 치러진 고등고시 시험문제의 모범답안 400개를 구해 200여일 동안 모조리 외워버렸다. 그는 56 7월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처음으로 응시했고, 바로 합격했다.

 

그는 이듬해 8월부터 동기생들과 함께 대구에서 검사시보 생활을 시작했다. 용시보는 출근은 열심히 했다. 그러나 퇴근후가 문제였다. 그는 선배 검사와 판사들을 따라 거의 매일 술을 퍼마셨다. 그는 『마시고 또 마시며, 놀고 또 놀았다』고 당시의 생활을 말했다.

 

처음에는 검사들을 따라다니며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는 검사들을 데리고 다니며 술을 마셨다. 대구 유흥가에서는 「용시보 거리」도생겨났다. 이런 그를 보고 고시 동기였던 김석휘검사(전 검찰총장·법무부장관)는 「천하의 용태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법조계에서는 지금도 그를 「천하의 용태영」으로 부른다.

 

술값은 전부 외상으로 했다. 월말이 되면 술값청구서가 수북히 쌓였다. 그는 대구시내 3개 경찰서의 계장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만해도 검사의 위세가 대단한 때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외상술값 전표를 한더미씩 그들에게 안겼다. 용변호사는 『그렇게 해서 관폐(官弊)를 끼치기는 했지만 민폐(民弊)는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시보를 마치고 검사를 지원했지만 임관되지 못했다. 그를 잘 아는 한 변호사는 『용씨가 시보시절 술을 마시다 경찰관이 불심검문을 하자 「아랫 ×들에게 손으로 신분증을 내밀 수 없다」며 시보신분증을 발가락에 끼워 보여준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임관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이에 대해 『좀 과장된 이야기다. 그러나 경찰관들이 청와대에 진정을 하는 바람에 임용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81 1월 「보국안민」(保國安民)을 내세우며「안민당」을 창당하고 스스로 당총재겸 대통령후보 자리에 올랐다. 그는 『창당 다음달 제12대 대통령 선거 (간접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전두환 군사정권의 방해로 후보등록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그 이후 정치에서 손을 뗐으며 92년부터는 「대일(對日) 민족소송」 단장으로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의 법률구조를 해오고 있다.

 

한 원로 변호사는 『요즘 법조인 중에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기인(寄人)들이 많다. 그러나 용변호사는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을 자유롭게 살아온 진정한 기인(奇人)이다』고 말했다. 또 후배 변호사는 『용변호사를 「훌륭한」 법조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필요한」법조인이다』고 말했다.

 

▶ 자서전 황야의 노방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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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치범 전 국회의원(42회)

 

 진치범 장군은 충북 중원 출신으로 공사2기로 임관 후 초급, 고급 지휘관과정을 모두 수석으로 마쳤다.

 

1960년대 후반 무장공비 남파, 푸에블로호 납북 등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 대가로 제공된 미국의 특별군사원조로 160여대가 도입되었는데  당시 공군에서 선발된 진치범 대대장을 비롯한 16명의 최정예 공군전투조종비행사들로 구성된 요원들에 의해 최초의 팬텀F4D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6대가 1969년 대구공군기지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북한에 비해 열세이던 공군전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당시 진치범 대령은 초대 F4D비행대대장으로서 조국영공 수호를 위해 맹활약하였다.

 

이후 소장으로 예편 후 제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충북 중원 출신

공사2기 임관

서울대행정대학원

최초의 팬텀F4D비행대대장

공군작전사 부사령관

전투비행단장

방공관제단장

12대 국회의원

 

사진 가져온 곳 : 대한민국무공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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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위치로 이전,합병하기 전 서울 동숭동의 官立京城工業學校 본관(국립공업시험원에 이어 현재 한국방송대 역사관으로 사용 중)으로 사적 제279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1939  모교의 전신인 京城公立工業學校 본관으로 건축된 현 서울공고 본관도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등록문화재 1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로써 서울공고의 교사와 교사 모두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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