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석영 전 이화여대 자연과학대학 수학과 교수(46회 기계)

 

2000년도 대한수학회 공로상 이석영 회원(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 교수) 수상

 

이석영 회원은 195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학교에서 수학교육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68Fulbright 장학생으로 도미하여 1973년 미국델라웨어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귀국 후 1979년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 회원의 주요 연구 분야는 복소해석학인데, 그 동안 6권의 저서와 국내외에서 60여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는 등 매우활발한 연구 및 교육 활동을 계속하여 왔다. 이 회원은 귀국 후 1974년부터 19832월까지 전남대학교에서 조교수,부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당시 대한수학회 전라제주 지부의 초대총무로 활약하면서 대한수학회 지부활동과 Honam Mathematical Journal의 창간에 크게 공헌하는 등 학술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왔다. 1983년 이화여자대학교로 근무지를 옮긴 후, 후학 양성에 힘쓰고 특히 대학원 교육을 활성화시켜 이화여대 수학과에서 첫 박사를 배출하였다.

 

이 회원은 학회 발전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대한수학회 재무이사를 맡으면서 당시 조태근 회장과 함께 모금 활동에 힘을 기울여 마포 성지빌딩의 사무실을 마련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1986년부터 1988년까지 대한수학회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임정대 회장과 함께 지역별 지부활동의 활성화에 힘쓰고 대한수학회 학술상,공로상 등 제반 학회 업무가 정착되는 데에 공헌하였다.

 

이 회원은 복소해석학 분야의 각종 국제 학술활동을 조직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여, 1993년부터 일본, 중국, 한국, 베트남, 홍콩 등에서매년 개최되어 올해 8회에 이르고 있는 「국제유한·무한 차원 복소해석학 콜로퀴엄」을 조직하여 왔으며 1995년에는 이 대회를 이화여대에서 주관하기도 하였다. 또한, 1998년부터 열

리고 있는 「국제 실수 및 복소 해석학 워크샾」조직에도 관여하여 올해 이 대회를 이화여대에서 주관하였다. 특히, 이 회원은 이화여대수리과학연구소장으로 근무하면서, 작년 11월수리과학의 발전과 여성수학인의 역할이라는 주제로「제 1회 여성수학인 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성공적으로 대회를 마친 바 있다.

부인 전영순 여사와 2남을 두고 있는 이석영회원은 앞으로도 우리 나라 수학분야의 발전을위하여 계속 공헌할

 

▶ 

서울대 문리대 수학과

미국 델라웨어대 대학원

이화여대 수학과 교수

이화여대 수리과학연구소장

이화여대 명예교수

 

▣ 가져온 곳 : 대한수학회 홈페이지>대한수학회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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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석 (주)팬엔터테인먼트 회장(67회)

 

 

 

 

 박영석 회장이 이끄는 ㈜팬엔터테인먼트는 1998년 음반기획사로 출발하였으나, 이후 한류 확산의 기폭제가 된 겨울연가를 비롯해 찬란한 유산, 해품달, 세계테마기행 등 히트 콘텐츠를 꾸준히 선보이며 국내 최고의 드라마 제작사로서 우수 콘텐츠를 공급하여 드라마 한류를 이끌어 왔다.

 

박영석 회장은 전세계에 지속적인 우수 콘텐츠를 공급하여 드라마의 해외 수출 활성화에 이바지한 공로로 .2011년 무역의 날 문화영상부문 특별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한편 2012년 상암동글로벌미디어콘텐츠센터더팬의 신사옥으로 이전한 ㈜팬엔터테인먼트는 대형엔터테인먼트사로서  드라마, 예능교양, OST, 매니지먼트 등을 아우르는 포트폴리오를 구축, 글로벌 종합미디어 그룹으로 도약해 나아가고 있다.

 

상암DMC의 랜드마크 타워인 더팬은 디지털미디어시티역 9번 출구역 근처로 맛집이 많아 외식코스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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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준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 회장(69회)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의 창업자이자 전 회장인 이상준 동문이 식도암 수술 후 제주에 정착, 그룹 소유인 선린지리조트에서 귀농학교와 제주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며 평범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그는 베트남 리왕조의 마지막 왕자로 고려에 정착한 이용상이 시조인 화산 이씨 후손으로 지금도 베트남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으며 한베재단에 사재 85억원을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공대 재학 시절 노동운동에 투신, 노동자로서 7~8년 간 노동운동을 하였고, 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의 소멸 후 사회주의의 모순에 환멸을 느끼고 ,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7번쨰 창업한 철거전문회사 조차도 97년 금융 위기 시 도산 후, 대학 후배인 김영선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구조조정과 M&A 전문기업으로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을 창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지금은 일신상의 이유로 고문으로 물러나 대주주로써 경영에 관한 조언만을 하고 있다.

 

그는 2005년 우리사회의 갈등원인과 해소방안에 관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비평가가 많은 사회는 망하고, 작가가 많은 사회는 발전한다는 의미 깊은 말을 남겼다.

 

아마 요즘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 타성에 젖은 공직사회, 현실적인 대안제시 없는 거친 언행으로 무조건적인 비판만을 가하는 이들에 대해 침묵하는 다수의 생각을 대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준 전 골든브릿지투자금융그룹회장의 쾌유와 제주에서의 행복한 삶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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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용태영 변호사

from 인물사(史) 2014. 5. 17. 09:21

 ▣ 故 용태영 변호사

 

 용태영 변호사는 1945 8.15 해방 후 당시 재학생 명부에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약 60~70%에 이르는 일인 학생들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편입 시 3학년으로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모교70년사에 따르면 이 시기 사회는 물론 교내에서도 극심한 좌우대립으로  면학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고,  기존 경공 재학생들도 이런 분위기와

 편입생들과의 괴리감 등으로 많이 학교를 그만 두었다고 한다. 용태영 변호사는 2년 여를 다니다 4학년 정도에 중퇴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상 졸업 시 40회로 이는 마찬가지로 중퇴 후 경복중학교로 옮겨 졸업한 류택형 변호사와 같은 시기에 재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류택형 변호사는 서울법대 졸업 후 고시 8회 수석, 행시합격으로 당시 최초의 고시2관왕으로

현재도 법조원로자문회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용태영 변호사는 2년 전 작고 시까지도 변협 원로자문회의 공동대표를 류택형변호사와 함께 맡아

활발히 활동하였다. 졸업은 하지 못했지만 경공 동창으로 두분이 끈끈한 우정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 경기 수원

    서울공립공업중학교(해방 이후에도 상당 기간 경성공립공업학교의 약칭인 京工 불리웠음) 중퇴

    육사10

    고등고시 사법과 10

    수도변호사회 회장,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헌변) 부회장

    변협 원로자문회의 공동대표

 


▷관련 글 ; 글 쓰신 분 : 1996년 동아일보. 이수형 기자

 

이마로 도끼 까며 내식대로 살았소

 회고록 첫권 「황야의 노방초」낸 용태영변호사, 법조 40奇人 같은 삶 반추

 

천하의 영재들이 모이는 법조계에는 그만큼 기인(奇人)들도 많았다. 일제시대 사흘 낮밤을 고민하다 처자가 잠든 사이 출가해 고승 효봉이 된 이찬형 판사, 말술을 마시고 대취하면 늘 천년 전의 몽골가곡을 부르던 김사룡 검사장, 자유당시절 전화교환원이 전화를 늦게 받았다는 이유로 구속을 했던 서병균 대구고검차장 등은 법조계의 전설 같은 기인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같은 법조계의 기인들이 사라지고 없다. 대부분의 검사 판사 변호사들이

오로지 법」과 「기준」 만을 내세운다. 틀에 맞춘 규격품처럼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세상의 「정의」는 있을지 몰라도 인생의 「멋」은 없다.

 

용태영(龍太暎·68)변호사는 「법조계 최후의 기인(奇人)」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그는 법조인으로서 「기준」에 가장 가까이 살면서도 늘 그 「기준」을 벗어나 살아왔다. 이런 그를 보고 법조후배이면서 시인인 김동현(金洞玄)변호사는 『용변호사는 단순한 기인이 아니라 기이인(奇異人)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용변호사는 1126일 자신의 「기행」(奇行)을 총결산하는 회고록을 출간했다.

회고록의 이름은 「황야(荒野)의 노방초(路傍草)Ⅰ

이 책은 여느 회고록과는 다르다. 책 이름도 예사롭지 않고 용 한마리가 꿈틀거리는 표지도 독특하다. 언뜻 보면 중국의 무협지 같다. 내용도 특이하다. 용변호사 자신도 「법조계의 삼국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책의 내용은 허구가 아니며 모두 사실』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날 오후 세종문화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출판기념회에는 용변호사와 고시 동기인 신한국당 이회창 고문 등이 나와 축사를 해주었다.

 

용변호사는 회고록 집필작업을 계속해 2000년까지 전 7권으로 된 「사상 최장(最長)의」 회고록을 완간할 계획이다.

 

그는 『회고록 2권은 이미 탈고했고 나머지 3∼7권의 목차도 다 정해놓았다』고 말했다. 회고록의 「총론」에 해당하는 1권에는 중졸의 학력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해 수도변호사회 회장이 되고 「안민당」 총재가 되어 대통령후보로 추대되기까지의 파란 많은 인생역정이 기록되어있다.

 

용변호사는 『길가에 이름없이 피어 사람과 짐승에게 짓밟히고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노방초」가 나의 삶과 비슷해 회고록 제목을 「황야의 노방초」로 지었다』고 했다.

 

용변호사의 평생 신조(信條)는 『이마로 도끼를 깐다』는 것이다. 그는 변호사 초창기시절 거대 종교단체를 상대로 소송을 한 일이 있다. 그 종교단체의 신도가 용변호사의 소송에 불만을 품고 『도끼로 이마를 까겠다』고 협박을 해왔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그렇다면 나는 이마로 도끼를 까겠다』고 응수했다. 그는 이 때부터 이마로 도끼를 까는 것을 신조로 삼아왔다.

 

용변호사는 실제로 「이마로 도끼를 까」 승리한 일이 있다. 용변호사는 73 3월 정부를 상대로 석가탄신일을 공휴일로 지정해달라는「석탄일 공휴권 확인청구소송」 (행정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그것이 무슨 소송거리가 되느냐』고 핀잔을 주었다. 고등법원의 판사들도 『소송요건이 안된다』며 각하하려는 분위기였다.

 

용변호사는 「물귀신 작전」을 썼다. 그는『그러면 국교(國敎)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하는 근거는 무엇이냐』며 크리스마스를 공휴일에서 제외하라는 소송을 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용변호사의 이같은 「고집」에 정부도 손을 들고 75년부터 석탄일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의 덕택에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명예」를 회복했고 국민들은 공휴일을 하루 더 얻었다.

 

서울 구의동에 있는 조계종 산하 영화사(永華寺)는 그의 공로를 기려 「석탄일 공휴제정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또 태고종측에서는 『용변호사가 불교계의 30년 한을 풀어주었다』며 그에게 「화세」(華世·현실세계의 극락을 의미하는 龍華世界 줄인 말)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중학 2년 자퇴고시 모범답안 400개 달달 외워 합격

 

용변호사는 1928년 경기도 수원의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경공(京工·지금의 서울공고) 2년 다니다 자퇴했다. 그는 50년 군에 입대해 6·25전쟁을 치른 뒤 제대했다. 제대 후 아무 직업도 없이 방황하다 54년 무렵 청산(靑山) 백운학이라는 운명철학자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청산은 그를 보고 『법조인이 될 관상을 지녔다』고 말해주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난생 들어보지도 못했던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55년말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자도 제대로 모르는 처지에 고등고시 공부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 일제시대부터 치러진 고등고시 시험문제의 모범답안 400개를 구해 200여일 동안 모조리 외워버렸다. 그는 56 7월 제8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처음으로 응시했고, 바로 합격했다.

 

그는 이듬해 8월부터 동기생들과 함께 대구에서 검사시보 생활을 시작했다. 용시보는 출근은 열심히 했다. 그러나 퇴근후가 문제였다. 그는 선배 검사와 판사들을 따라 거의 매일 술을 퍼마셨다. 그는 『마시고 또 마시며, 놀고 또 놀았다』고 당시의 생활을 말했다.

 

처음에는 검사들을 따라다니며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는 검사들을 데리고 다니며 술을 마셨다. 대구 유흥가에서는 「용시보 거리」도생겨났다. 이런 그를 보고 고시 동기였던 김석휘검사(전 검찰총장·법무부장관)는 「천하의 용태영」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법조계에서는 지금도 그를 「천하의 용태영」으로 부른다.

 

술값은 전부 외상으로 했다. 월말이 되면 술값청구서가 수북히 쌓였다. 그는 대구시내 3개 경찰서의 계장들을 불러 모았다. 당시만해도 검사의 위세가 대단한 때여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외상술값 전표를 한더미씩 그들에게 안겼다. 용변호사는 『그렇게 해서 관폐(官弊)를 끼치기는 했지만 민폐(民弊)는끼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시보를 마치고 검사를 지원했지만 임관되지 못했다. 그를 잘 아는 한 변호사는 『용씨가 시보시절 술을 마시다 경찰관이 불심검문을 하자 「아랫 ×들에게 손으로 신분증을 내밀 수 없다」며 시보신분증을 발가락에 끼워 보여준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임관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이에 대해 『좀 과장된 이야기다. 그러나 경찰관들이 청와대에 진정을 하는 바람에 임용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81 1월 「보국안민」(保國安民)을 내세우며「안민당」을 창당하고 스스로 당총재겸 대통령후보 자리에 올랐다. 그는 『창당 다음달 제12대 대통령 선거 (간접선거)에 출마하려 했으나 전두환 군사정권의 방해로 후보등록조차 못했다』고 말했다. 용변호사는 그 이후 정치에서 손을 뗐으며 92년부터는 「대일(對日) 민족소송」 단장으로 태평양전쟁 희생자들의 법률구조를 해오고 있다.

 

한 원로 변호사는 『요즘 법조인 중에는 돈과 권력에 집착하는 기인(寄人)들이 많다. 그러나 용변호사는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을 자유롭게 살아온 진정한 기인(奇人)이다』고 말했다. 또 후배 변호사는 『용변호사를 「훌륭한」 법조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는 「필요한」법조인이다』고 말했다.

 

▶ 자서전 황야의 노방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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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치범 전 국회의원(42회)

 

 진치범 장군은 충북 중원 출신으로 공사2기로 임관 후 초급, 고급 지휘관과정을 모두 수석으로 마쳤다.

 

1960년대 후반 무장공비 남파, 푸에블로호 납북 등 북한의 위협이 고조되던 시기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 대가로 제공된 미국의 특별군사원조로 160여대가 도입되었는데  당시 공군에서 선발된 진치범 대대장을 비롯한 16명의 최정예 공군전투조종비행사들로 구성된 요원들에 의해 최초의 팬텀F4D가 미국에서 태평양을 건너 6대가 1969년 대구공군기지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북한에 비해 열세이던 공군전력이 획기적으로 향상되었다. 당시 진치범 대령은 초대 F4D비행대대장으로서 조국영공 수호를 위해 맹활약하였다.

 

이후 소장으로 예편 후 제1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충북 중원 출신

공사2기 임관

서울대행정대학원

최초의 팬텀F4D비행대대장

공군작전사 부사령관

전투비행단장

방공관제단장

12대 국회의원

 

사진 가져온 곳 : 대한민국무공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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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최초의 TV방송광고제작자 최덕수(43회)

 

한국최초의 TV방송광고제작자인 최덕수 동문 관련글을 올립니다.

 

서울

고려대 졸

미 메릴랜드대, 시라큐스대 대학원 수학

 

 ◈ 가져온 곳 : 한국방송광고공사의 메가진인 '광고홍보'에서

 

People Now

고속 성장 시대를 달려온 방송·광고계산 증인

송은아 기자 / 사진 박정훈

 

 

최덕수 대광기획 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TV 광고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 HLKZ-TV, KBS, TBC, 제일기획 , 대광기획 등을 거치며방송 ·광고산업의 고속성장에 기여해왔다.


최덕수 대광기획 회장은 그야말로 우리 방송·광고 산업의산 증인이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HLKZ-TV, KBS, TBC 등 초기 방송사들이 발전 기반을 닦는데 20여년간 종사해왔다. TBC 업무국장을 끝으로 방송사를 나온 뒤에는 제일기획, 태평양 등을 거치며 한국 광고의 선진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레코드 판 위에서 성장(
盛裝)을 한 젊은 남녀가 춤을 추고 있다. 카피는깨지지 않는 유니버어설 레코오드.”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인 유니버설 레코드 광고다.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국인 HLKZ-TV가 개국한 1956 5 12, 개국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라고 할유니버설 레코드 아워에 스폰서인 유니버설 레코드가 붙인 광고였던 것. 이 광고의 제작자가 바로 최덕수 대광기획 회장이다.
당시 레코드 원료가 없어서 일본 레코드 판 위에 찍었어요. 듣다 보면 일본 노래가 나왔죠. 그런데, 피아노 만드는 영창 알죠? 영창산업 계열사인 유니버설 레코드에서 LP판과 같은 비닐 소재인 세락을 사용한 레코드를 내놓았어요. 이게 얇으면서도 다른 레코드와 달리 깨지질 않았어요. 그래서 깨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레코드 위에서 춤추는 남녀를 그려 넣은 거죠. 춤은 물론 당시의 유행을 반영한 거예요. 굉장히 분명한 광고 콘셉트를 가지고 만들었어요. 모두 한국전쟁 당시 심리전에서 배웠던 거죠
.”
최덕수 회장이 광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렇게 먼 시절로 되돌아간다. 음악, 미술, 문학에 심취해 있던 학창시절의 영향과, 미술 특기로 삽화병이 되어 대적선전(
對敵宣傳) 작전에 종사하면서 인간의 심리를 살피고 그것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을 한 것이 광고의 기본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영창산업 일가(一家)인 김재환 소령을 만나 유니버설 레코드 소속 가수인 남인수, 백설희 씨 레코드의 자켓을 그려주었고, 제대 후엔 영창산업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를 만들었다. 그 광고를 인연으로 최덕수 회장은 HLKZ-TV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 이후 최덕수 회장의 경력은 방송을 무대로 펼쳐진다. HLKZ-TV 미술부에서 출발, 프로듀서, 디렉터 일을 했으며, HLKZ-TV가 소실된 뒤에는 AFKN에서 한국어 HLKZ-TV 방송을 만들었다. 1961 KBS가 설립되면서는 초대 편성, 영화계장이 되었다가 1963 TBC 설립에 기여하면서 초대 편성과장이 되고 1973년에는 TBC의 업무국장에 오른다
.
이렇게 TV 편성, 제작 등을 주 업무로 하기는 했지만, 틈틈이 광고와 관련된 업무를 하거나 광고업계에 영향을 미칠 결정들을 했다는 것이 최회장의 회고다. AFKN에서 한국어 HLKZ-TV방송을 할 당시에는 국내 최초로 매체로부터 인정받은 광고회사인신민방송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대표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TBC의 편성국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덴츠와 하쿠호도, 센코샤를 시찰했고, BBDO에서 연수를 할 기회를 가졌다. TBC 업무국장 시절에는 한국광고협의회(한국광고단체연합회의 전신)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MBC가 광고회사에게 대행수수료를 8% 주는 동안 10%를 고수한 것도 광고회사의 성장에 일조했다고 믿는다
.
1975
년 신세계백화점 대구지점장으로 부임하면서 방송 일에서는 손을 떼게 되지만, 오히려 이후로 광고관련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8개월만에 신세계백화점 대구지점장을 그만 두고 제일기획 영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광고전략 프레젠테이션을 도입하고 FA(First Advertising Award) 시상제도를 도입했으며, 1977년에는 태평양 홍보·광고 이사로 활동하며 태평양 기업 이미지를 바꿨다고 자평한다. 아모레 화장품은 얼굴은 물론 마음도 아름다워진다는 인식을 소비자에게 주고자 노력했다고. ‘앞서 가는 새 기술 삼성전자’, ‘즐기며 배우자 에버랜드’, ‘대를 물리는 피아노 영창 피아노등은 최회장이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자신이 만든 슬로건들이다. 1980년 광고회사 대광기획을 차린 뒤에는 삼양식품, 럭키화학, 농심, 금성사, 현대자동차 등의 광고를 제작했고, ‘세계명작광고 200광고의 체크리스트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

“‘
세계명작광고 200은 중앙일보, 동양방송 사보, 광고정보에 연재된 세계 명작 광고를 묶은 책이고, ‘광고의 체크리스트는 광고의 기초를 확립시킨다는 뜻에서 펴냈어요. 제일기획에서는 300권을 사서 전 직원에게 배포해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죠
.”
그 외에도국제골프’, ‘해외광고’, ‘월간 오디오등의 사장을 역임했고, 문화일보, CJ홈쇼핑 등의 고문을 맡아왔다. 그동안의 궤적을 일일이 열거하는 데만도 지면을 모두 할애해야 할 지경이다
.
인터뷰를 위해 연희동의 자택 겸 사무실을 방문한 11 22일은 마침 대광기획의 폐업신고가 처리된 날이라고 했다. 그렇게 방송 1세대, 광고 1세대의 시절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물론 대광기획이 문을 닫았다고 해서, 최덕수 회장이 집에 칩거만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책상 위 달력에는 1주일에 5~6일이 약속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방송, 광고계 지인들과 주고받는 이메일만도 하루 2~30통에 달한다고 한다. 매주 등산도 하고 야유회도 가끔 간다고. 78세에 이른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이, 마치 한국의 방송 산업이 고속 성장하던 그 시절의 동력(
動力)이 육화(肉化)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지금 우리 세대에게 결여되어 있는 건, 성장의 외부 동력일까, 내부적 동인일까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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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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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전 국회의원

전남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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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전 국회의원

from 인물사(史) 2014. 2. 19. 17:59

최선영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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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일 전 국회의원

from 인물사(史) 2014. 2. 1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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