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악(辛泰嶽) 前 대한변호사협회 회장

 

신태악(辛泰嶽)

 

1902∼1980 법률가. 본관은 영월(寧越). 호는 일성(一星). 함경북도 부령출신.
1919년 경성공업학교 재학중 3·1독립운동에 학생대표로 참가하여 6개월의 옥고를 치렀고, 1921년 신의주설화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924년에는 시대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활약하였다.
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 1931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그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 1932년에 변호사 개업을 하여 신간회의 재건을 위하여 김병로(金炳魯)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35년에는 조선발명협회 이사, 1936년에는 조선일보사 취체역을 지냈다.
1942년 일제의 사법당국으로부터 사상불온이라는 이유로 8개월의 변호사직무정지처분을 당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면서 구국문화사(救國文化社)를 창립하여 월간지 《구국》을 발행하였고, 1952년에는 자유당 창당준비책임위원, 자유당 감찰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1958년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냈으며, 1963년 민정당(民正黨) 전당대회의장, 1966년 신민당 운영위원장, 1971년 국민당 정무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힘썼다.

참고문헌

  • 韓國辯護士史(大韓辯護士協會, 1979)
  • 韓國法曹人大觀(法律新聞社, 1982)
  • 大韓辯護士協會誌(大韓辯護士協會, 1981). 〈朴禹東

출처: 한국학 사전

 

서울工高 70년사에 기고한 신태악 동문의 글에 의하면 3.1운동 당시 그는 한국학생 동원책임자로 동숭동 같은 구내의 경성공업전문학교 김대우에게 연락을 받고 1, 2학년 학생 10명과 함께 종로 파고다 공원에 가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일경에 체포되어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었고 6개월 후 출감하여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편입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활발한 반일활동을 하던 그도 일제 말에는 이광수 등 대부분 유력인사들과 마찬가지로 친일행적을 보여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한국위키백과에 보면 신태악 동문에 대한 다른 인물평이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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