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사(史)
한국최초의 TV방송광고제작자 최덕수(43회)
infinite21k
2014. 3. 29. 12:12
▶ 한국최초의 TV방송광고제작자 최덕수(43회) |
한국최초의 TV방송광고제작자인 최덕수 동문 관련글을 올립니다.
▶
서울
고려대 졸
미 메릴랜드대, 시라큐스대 대학원 수학
◈ 가져온 곳 : 한국방송광고공사의 메가진인 '광고홍보'에서
People Now |
고속 성장 시대를 달려온 방송·광고계 ‘산 증인’ |
송은아 기자 / 사진 박정훈
최덕수 대광기획 회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TV 광고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 HLKZ-TV, KBS, TBC, 제일기획 , 대광기획 등을 거치며방송 ·광고산업의 고속성장에 기여해왔다. |
최덕수 대광기획 회장은 그야말로 우리 방송·광고 산업의 ‘산 증인’이다. 1956년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를 제작했을 뿐 아니라, HLKZ-TV, KBS, TBC 등 초기 방송사들이 발전 기반을 닦는데 20여년간 종사해왔다. TBC 업무국장을 끝으로 방송사를 나온 뒤에는 제일기획, 태평양 등을 거치며 한국 광고의 선진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레코드 판 위에서 성장(盛裝)을 한 젊은 남녀가 춤을 추고 있다. 카피는 “깨지지 않는 유니버어설 레코오드.”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인 유니버설 레코드 광고다.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국인 HLKZ-TV가 개국한 1956년 5월 12일, 개국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유니버설 레코드 아워’에 스폰서인 유니버설 레코드가 붙인 광고였던 것. 이 광고의 제작자가 바로 최덕수 대광기획 회장이다.
“당시 레코드 원료가 없어서 일본 레코드 판 위에 찍었어요. 듣다 보면 일본 노래가 나왔죠. 그런데, 피아노 만드는 영창 알죠? 영창산업 계열사인 유니버설 레코드에서 LP판과 같은 비닐 소재인 세락을 사용한 레코드를 내놓았어요. 이게 얇으면서도 다른 레코드와 달리 깨지질 않았어요. 그래서 깨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레코드 위에서 춤추는 남녀를 그려 넣은 거죠. 춤은 물론 당시의 유행을 반영한 거예요. 굉장히 분명한 광고 콘셉트를 가지고 만들었어요. 모두 한국전쟁 당시 심리전에서 배웠던 거죠.”
최덕수 회장이 광고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이렇게 먼 시절로 되돌아간다. 음악, 미술, 문학에 심취해 있던 학창시절의 영향과, 미술 특기로 삽화병이 되어 대적선전(對敵宣傳) 작전에 종사하면서 인간의 심리를 살피고 그것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는 일을 한 것이 광고의 기본을 다지는 기회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영창산업 일가(一家)인 김재환 소령을 만나 유니버설 레코드 소속 가수인 남인수, 백설희 씨 레코드의 자켓을 그려주었고, 제대 후엔 영창산업에 들어가 우리나라 최초의 TV광고를 만들었다. 그 광고를 인연으로 최덕수 회장은 HLKZ-TV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그 이후 최덕수 회장의 경력은 방송을 무대로 펼쳐진다. HLKZ-TV 미술부에서 출발, 프로듀서, 디렉터 일을 했으며, HLKZ-TV가 소실된 뒤에는 AFKN에서 한국어 HLKZ-TV 방송을 만들었다. 1961년 KBS가 설립되면서는 초대 편성, 영화계장이 되었다가 1963년 TBC 설립에 기여하면서 초대 편성과장이 되고 1973년에는 TBC의 업무국장에 오른다.
이렇게 TV 편성, 제작 등을 주 업무로 하기는 했지만, 틈틈이 광고와 관련된 업무를 하거나 광고업계에 영향을 미칠 결정들을 했다는 것이 최회장의 회고다. AFKN에서 한국어 HLKZ-TV방송을 할 당시에는 국내 최초로 매체로부터 인정받은 광고회사인 ‘신민방송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대표 자리에 올랐다고 한다. TBC의 편성국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덴츠와 하쿠호도, 센코샤를 시찰했고, BBDO에서 연수를 할 기회를 가졌다. TBC 업무국장 시절에는 한국광고협의회(한국광고단체연합회의 전신)의 부회장으로 활동했다. MBC가 광고회사에게 대행수수료를 8% 주는 동안 10%를 고수한 것도 광고회사의 성장에 일조했다고 믿는다.
1975년 신세계백화점 대구지점장으로 부임하면서 방송 일에서는 손을 떼게 되지만, 오히려 이후로 광고관련 일에 주력하게 되었다. 8개월만에 신세계백화점 대구지점장을 그만 두고 제일기획 영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겨 광고전략 프레젠테이션을 도입하고 FA(First Advertising Award) 시상제도를 도입했으며, 1977년에는 태평양 홍보·광고 이사로 활동하며 태평양 기업 이미지를 바꿨다고 자평한다. 아모레 화장품은 얼굴은 물론 마음도 아름다워진다는 인식을 소비자에게 주고자 노력했다고. ‘앞서 가는 새 기술 삼성전자’, ‘즐기며 배우자 에버랜드’, ‘대를 물리는 피아노 영창 피아노’ 등은 최회장이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자신이 만든 슬로건들이다. 1980년 광고회사 대광기획을 차린 뒤에는 삼양식품, 럭키화학, 농심, 금성사, 현대자동차 등의 광고를 제작했고, ‘세계명작광고 200선’과 ‘광고의 체크리스트’라는 저서를 출간했다.
“‘세계명작광고 200선’은 중앙일보, 동양방송 사보, 광고정보에 연재된 세계 명작 광고를 묶은 책이고, ‘광고의 체크리스트’는 광고의 기초를 확립시킨다는 뜻에서 펴냈어요. 제일기획에서는 300권을 사서 전 직원에게 배포해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죠.”
그 외에도 ‘국제골프’, ‘해외광고’, ‘월간 오디오’ 등의 사장을 역임했고, 문화일보, CJ홈쇼핑 등의 고문을 맡아왔다. 그동안의 궤적을 일일이 열거하는 데만도 지면을 모두 할애해야 할 지경이다.
인터뷰를 위해 연희동의 자택 겸 사무실을 방문한 11월 22일은 마침 대광기획의 폐업신고가 처리된 날이라고 했다. 그렇게 방송 1세대, 광고 1세대의 시절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물론 대광기획이 문을 닫았다고 해서, 최덕수 회장이 집에 칩거만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책상 위 달력에는 1주일에 5~6일이 약속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방송, 광고계 지인들과 주고받는 이메일만도 하루 2~30통에 달한다고 한다. 매주 등산도 하고 야유회도 가끔 간다고. 78세에 이른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모습이, 마치 한국의 방송 산업이 고속 성장하던 그 시절의 동력(動力)이 육화(肉化)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지금 우리 세대에게 결여되어 있는 건, 성장의 외부 동력일까, 내부적 동인일까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