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건축의 학문적 기틀을 세운 서울대 명예교수 윤장섭 박사(33회 건축)

::: 끊임없는 자기 계발로 한국 건축의 학문적 기틀을 세운 윤장섭 교수 :::

                                                                   이언구 (중앙대 건축학과 교수)  

 

흔히들 건축은 예술과 과학이 통합된 학문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건축이 도시를 아름답게(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꾸미고, 인간 생활에 문화적 활력소를 제공하며, 독창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측면에서 건축은 분명히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건축이 우리들에게 건강하고 안전하면서도 쾌적한 삶의 터전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학적 기술이 접목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예술과 기술의 통합은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이해를 바탕으로 성립한다는 점에서 건축이라는 학문이야말로 가장 광범위하면서도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학제간(interdisciplinary) 성격의 학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이 학문으로서 교육되고 연구되어 온 역사는 다른 학문 분야에 비해 매우 일천하다. 세계적으로도 19세기 중엽까지 건축은 단지 도제식(apprenticeship)의 일방적 기술 전수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고, 180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대학교육의 체제안에 자리잡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일제시대인 1916년 총독부에서 설립한 경성공업전문학교에서 처음으로 학제화된 건축교육을 실시하였으나 주로 일본인을 대상으로 기술 위주의 전문교육에 치중하였으므로, 해방후 1946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내에 신설된 서울대학교 건축학과가 대학 건축교육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소우(篠愚) 윤장섭(尹張燮) 교수는 1946년 서울대 건축학과의 첫 신입생으로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8명 졸업)했으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체계적인 건축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졸업 후 바로 서울대 대학원에 입학하였고, 전쟁으로 이를 계속하지 못하다가 1958년 미국 MIT 건축대학원에 유학하여 1959년 석사 학위를 받았으니, 아마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건축 분야에서 외국 유학을 한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하고 바로 한양대에서 시간강사를 하였고, 또 군복무 후 1955년에 한양대 교수, 1956년에 서울대 교수가 되었으니 우리나라 건축교육에 있어 선구자임이 틀림없는 일이다. 그러나 윤장섭 교수는 이와 같이 연대기적인 선구자로 남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일흔 다섯 되던 1999년에 『중국의 건축』이라는 중국 건축 문화의 발자취를 정리한 저서를 출간하더니, 이듬해에는 다시 『일본의 건축』이라는 역저를 출간하고 있으니 말이다. 희수를 넘긴 지금도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과 학문 연구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는 윤장섭 교수가 앞으로 어떻게 후학들을 놀라게 하고 채찍질할지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다. . 학문적 토대 소우 윤장섭 교수는 1925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1941 5년제 관립 경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주택영단(지금의 주택공사)에서 2년간 건축기사로 근무한 후 다시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 건축과에 입학하게 된다. 건축을 공부하게 된 동기가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여 주변에서 건강 유지를 위해 건축을 하라는 권유 때문이었다니,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도 규칙적으로 테니스를 즐길 수 있는 건강의 비결이 정말 ‘건축’에서 나온 모양이다. 공업전문학교 재학 중 줄곧 수석을 차지했던 윤장섭 교수는 해방 후 설립된 1946년 서울대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1950년 졸업하였으니 이때까지 건축교육만 11년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그의 건축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폭넓은 이해는 이때의 경험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였으나 6·25의 발발로 공군에 입대하여 시설 장교로서 4년 반을 근무한 후 1955년 공군 소령으로 제대한 그는 바로 한양대학교 전임강사로 부임하였고 1년 뒤인 1956 11월 서울대학교 전임강사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군 생활 내내 미국 유학을 꿈꾸던 윤장섭 교수는 1958 USOM 미국 파견 교육 프로그램의 주선으로 매사츄세츠 공대(MIT) 건축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때 MIT에서의 대학원 과정은 그의 건축교육과 연구 활동에 출발점이자 구심점이 되었다. Eduardo Catalino, Gyorgy Kepes, Pietro Bellushi, Lawrence Anderson 등 유명 교수와의 만남에서 얻은 교훈과 특히 당대 제일의 건축가이자 교육자인 Walter Gropius와의 만남은 그에게 일생동안 큰 영향을 미쳤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일생에 걸쳐 가장 큰 학문적 소재의 대상이 된 한국 건축 문화에 대한 관심이 바로 MIT 유학 시절에 싹텄다는 사실이다. 석사과정을 통해 보고 배운 세계 각국의 건축 문화는 그 사회의 역사와 가치관과 지역 특성 및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계승 발전되었다는 인식이 그로 하여금 그동안 무관심했던 한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을 일깨운 것이다. 윤장섭 교수는 귀국 후에는 대학에서의 교육뿐만 아니라 건축 연구 활동과 함께 설계 실무에도 참여하게 된다. 1960 USOM ICA주택설계에 참여하였고, 1965년에는 건설부 주거 및 도시주택연구실(HURPI)설립을 주도하였다. 1966년에는 국회의사당 기본 계획을 주관하여 작성하였고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계획 수립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1960년부터 1974년까지 직접 설계 사무실을 개설하여 운영하면서 다양한 건축 설계의 실무 경험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참고로 응용학문으로서의 건축의 특성상 건축과 교수들은 건축 이론과 실무 경험이 겸비되는 것이 필수적이고 외국에서는 당연한 일인데 우리나라에서는 ’70년대 중반부터 이를 금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후 윤장섭 교수는 1974년 모교인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신행정수도기획단 분과위원장, 중앙도시계획위원, 대만 성공대학 객원교수 등을 역임한 후 1980년 대한건축학회 회장, 1981년에는 학술원 회원에 선임된다. 1990년 정년퇴임을 하기까지 열정적인 연구 활동과 저술 활동을 통하여 한국출판문화상, 서울시 문화상, 과학기술도서상, 옥관문화훈장, 국민훈장 등의 상훈을 받기도 한 그는 현재에도 서울대 명예교수, 호서학원 감사, 문화재위원, 동우건축 고문 등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활발한 연구자문과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 학문적 발자취 윤장섭 교수는 교육자이자 건축가면서 동시에 철학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 계획과 설계를 가르치면서 ‘건축음향’이라는 환경기술적 전공 분야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그의 일관된 학문적 추구는 우리의 정신세계와 자연과 전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건축문화의 계승발전이었다. 그는 1973년에 10여 년 간 수집한 자료와 연구 내용을 참고로 『한국건축사』를 출간하였는데, 이 책은 그때까지 주로 일본인들의 자료에 의존하던 한국 건축의 역사를 주체성과 문화적 연계성에 입각하여 체계화시킨 최초의 전문 서적이다. 이 책은 출판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도 대학 교재 및 참고도서로 가장 애용되고 있으며, 그는 이 책으로 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연이어 자신의 연구 논문을 정리한 『한국건축사연구』, 『한국의 건축』, 『건축 공간과 노자사상』, 『한국건축사론』 등의 저술을 통하여 한국 전통 건축의 학문적 체계를 수립하는 작업을 지속하였다. 그의 한국 건축에 대한 이론적 체계 구축은 서양 건축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국 전통 건축에 대한 연구활동과 병행하여 서양 건축의 역사적 발전과정을 시대적 사회 문화의 이해로 설명하는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였고, 그 결과를 정리하여 『서양건축사』, 『서양근대건축사』, 『서양현대건축』 등의 저서를 발간하였으며, 이중에서 1987년 출판된 『서양근대건축사』는 그가 학술원상을 받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는 1978년이래 매년 봄가을로 학생들을 인솔하여 전국 방방곡곡으로 전통 건축 답사 여행을 다니곤 했는데, 이즈음에도 연구실 제자들로 구성된 소우회 회원들과 함께 국내외의 건축 답사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그의 연구물과 저서에 포함된 건축 자료는 대부분 그가 실제로 그렸거나 측정한 자료와 직접 찍은 사진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의 사진 실력은 전문가의 수준에 비견할 만 하다. ‘한국 건축’이 윤장섭 교수의 연구자로서의 관심의 대상이라면 ‘건축계획방법론’은 그의 건축가로서의 관심의 대상이다. 미국 유학 시절에 인상깊게 느꼈던 그들의 건축설계에 대한 합리적 접근방법을 서울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그는 『건축계획연구』, 『건축계획방법론』, 『디자이너의 사고방식』과 같은 저서를 출간하게 된다. 한국 건축과 건축계획방법론은 일견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그가 『소우 수필집』에서 기술한 다음의 글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 건축의 발전방향은 우리의 문화적 유산 속에 깊숙히 뿌리를 가져야만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의 현대적인 건축 표현을 찾기 위해서는 우선 건축디자인의 원리에 정통해야 한다. 다음에 우리 문화유산의 장점과 단점들을 이해하기 위해 연구하며, 좋은 문화유산을 현대적으로 변용하여 계승해 나가는 방안을 계속 추구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는 현대적인 건축 과학 및 기술과 재료들에 관하여 연구하며 그 활용 방법을 통달해야 한다. 이와 같은 모든 요소들을 통합화하는 프로세스를 거쳐 우리들의 특유한 현대적인 건축을 발전시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윤장섭 교수의 학문 세계에서 한가지 특기할 점은 그가 건축환경의 기술적 분야인 ‘건축음향’의 선구자라는 점이다. 그는 대학에서 ‘한국 건축’이나 혹은 ‘건축계획’과는 직접적 연관이 없는 ‘건축음향’을 20년 이상 강의하였고 『건축음향계획론』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건축음향 분야의 최초의 전문서적일 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도 이 책이 음향 분야에서 가장 내용이 충실한 책으로 자부하고 있다. 왜 그가 건축음향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지는 분명히 설명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과거 MIT시절에 연구 과제로 파리의 그랜드오페라 하우스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건축음향에 매료된 것이 아닌가 싶다. 여하간 그는 많은 건축음향에 대한 자문과 함께 석·박사 학생들의 연구 주제로 건축음향을 즐거이 택하곤 했다. . 맺는 말 윤장섭 교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일제시대부터 신앙생활을 해 온 터이기에 그의 일상에는 신앙적 내음이 배어 있다. 또한 이와 같은 신앙적 배경은 그의 건축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건축의 목적이나 건축가의 역할을 이야기할 때 자주 성경을 인용하곤 한다. 예수가 복음을 전할 때 종종 집 짓는 일에 비유한 성경 구절은 그가 논설이나 에세이에 즐겨 쓰는 말들이다. “집과 성전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서, 집을 짓는 것은 하느님의 범례에 따라 혼돈 속에 정연하게 질서 있는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종교적 해석에 따라 그는 항상 질서정연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을 추구해 왔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겸손하고 무례히 행치 않으며 자기를 주장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다.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늘 존대하면서 조용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마치 고전에서 보는 군자의 모습이다. 윤장섭 교수에게는 그가 ‘한국건축사’를 전공했다는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복과 전통차가 꼭 어울린다. 설날 같은 때 제자들이 세배라도 가면 항상 한복으로 차려입고 조용히 차를 격조 있게 대접하는 그를 볼 때 우아한 자태의 전통 한옥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아마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 가져온 곳 : 대학교육 제 114 | 2001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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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1 7일 서울 출생, 본관은 남원(南原), 아호는 소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

미국 MIT 건축대학원 건축학과 졸

공학박사

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교수

국회의사당 건립위원회 상임위원

대학건축학회 회장, 명예회장

문화재위원회 부위원장 및 제1분과위원장

()종합건축사사무소 동우건축 고문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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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영 전 한양대 부총장(35회 전기)

 

이만영 박사는 정보통신 정보보호분야의 암호학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석학이다.

컴퓨터나 인터넷이 우리 일상에 가까이 자리 잡은 지 불과 10년 전후인데, 이만영 박사는 1950년 대에 벌써 이런 학문을 연구하셨다는 것이 놀랍지 않습니까.

 

이만영 박사는 플브라이트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콜로라도대에서 서울공대 출신으로는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 후,  미국 보잉사 엔지니어로 근무하였다. 이후 한양대 교수,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교수로 재직하였다. 

 

70년대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 신설된 국방과학연구소의 초대 부소장으로  이후 삼성전자 반도체, 통신부문의 전신인 삼성반도체통신() 초대 대표이사를 역임 후 한양대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1962년 국내 최초로 아날로그컴퓨터를 제작한 바 있는데 제1,2 호기는 화재로 소실되고 제3호기가 한양대기념관에 보존, 전시되어 있다.

 

한양대 부총장을 끝으로 정년퇴임 후에도 서울대 초빙교수, 경희대 석좌교수로 강단에 섰다..

 

2010년에는 과학자들이 일생에 한 권의 책만 내도 큰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권위가 있는 세계적 출판사인 미국의 존 와일리가 통신보안시스템 분야의 ‘글로벌 최고 베스트셀러’로  이만영 박사의 저서인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보안’을 선정한 바 있다. 이 책은 3세대(3G) 이동통신을 중심으로 세대별 무선 이동통신시스템의 진화 과정과 구조, 동작원리, 음성, 고속패킷데이터 전송서비스 등에 대해 소개하면서 무선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기술 개발 및 다양한 보안문제 대처방안 등을 다뤘다.

 

올해 86세인 이만영박사는 존 와일리, 맥 그로-, 프렌티스 홀 등과 같은 세계적인 출판사에서 5권의 전문서적을 출판했는데 이는 한국 과학자로서 처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책을 쓸 때 세계인이 다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문 저술만 고집하였다한다.

 

주요저서 : 《오류정정부호이론》《암호이론》《모바일 커뮤니케이션 시스템과 보안》등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학사(52)

University of Colorado 공학박사(58)

Virginia 주립대학교 공대 교수(64)

삼성반도체통신 대표이사 사장(77)

한양대학교 교수, 부총장, 명예교수(82~현재)

서울대학교 전기공학부 초빙교수(98~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현재)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현재)

한국공학한림원 명예회원(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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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앞 서쪽 운동장에 화단 앞에 있는
『개교백주년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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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교 운동장 동쪽 화단에 세워져 있는

『한국실업교육발상지기념탑』

 

1899년 설립된 한국최초의 실업교육기관인 '관립상공학교'에 기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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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모교

from 포토 2011. 4. 18. 17:23

 

하늘에서 본 모교, 정남에서 서쪽으로 약간 틀어져 있다. 좌측에 대방초교, 우측 위로 성남중고가 보이고,북쪽으로 한강이 흐르는 여의도에 고층의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빽빽히 자리잡은 주택과 아파트들,  서울공고 등 몇개 학교운동장과 성남중고 옆의 녹지가 있어  지역의 허파역활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서울공고 남서쪽 일부 사람들만 이용하는 테니스장도 학생들에게 돌려 주거나, 교도소벽과 같이 폐쇄적인 수백 m의 붉은 벽을 헐어 녹지로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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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달홍 동문이 2006년 발족된 지식경제부 산하 IGCC사업단의 초대 사업단장으로서 재직하고 있다.   
 IGCC는 석탄가스화 복합발전으로 ‘Integrated Gasification Combined Cycle’의 약어이며 석탄으로부터 전기뿐만 아니라 수소, 액화석유까지 만들 수 있는 차세대 석탄발전기술로  예상되고 있으며,한국도 석탄가스화복합화력발전소의 착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원자력발전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요즘 에너지원의 다변화와 청정연료를 사용한 발전설비로서 환경개선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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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GCC사업단에서는 석탄가스화복합발전설비(300MW급)에 대한 기술개발사업과 퓨쳐 젠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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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 물리학과

국 리즈(Leeds)대 대학원 졸(연료및에너지 전공)

한국전력(주) 전력연구원 수화력발전연구소 IGCC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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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남파 박찬익 선생(3회 염직)

 


1884(고종 21) ~1949.

경기 파주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법무부장)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상해임시정부 대중국 외교활동의 중심인물이었고, 해방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서 적극활동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남파(南坡). 일명 박정일(朴精一)·박순(朴純)·박창익(朴昌益). 1904년 상공학교[각주:1] 재학중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 퇴학당한후,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관립공업전습소[각주:2] 를 졸업하고 한일합병이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해 이상설 등과 함께 독립투쟁에 가담하는 한편, 나철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해 정교(正敎)로서 포교활동도 했다. 이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노령의 동지들과 긴밀히 연락했다. 1918년 11월지린[吉林]에서 조소앙·김동삼 등 39명 명의의 무오독립선언 발표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임무를 전담했다. 같은 해 11월 쑨원[孫文]의 중국국민당이 광둥[廣東]에 중국호법정부(中國護法政府)를 수립하자 신규식과 함께 외교를 전개, 임시정부를 승인하게 하는 등 대중국외교를 담당했다. 1930년 한국국민당조직에 참가하고 대한독립당 대표로 난징[南京] 정부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임시정부를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 중국정부와 교섭을 벌였으며, 난징 중앙군관학교, 뤄양[洛陽]군관학교에 독립군 간부양성 과정을 설치하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임시정부가충칭[重慶]으로 옮긴 후 국무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駐華) 대표단장으로 활동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출처; 브리태니터배과사전) 


▣ 임시정부 외교 도맡아… 한중합작 항일투쟁 주도

2009년 7월30일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는 8월의 독립운동가로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선생님을 선정하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생님의 공적이 늦게 세상에 알려진 느낌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선생님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너무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시정부의 외교를 책임지고 광복군을 조직했던 그가 이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에게 공을 돌리는 겸양과, 직책이나 명성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분방한 천품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평생 그의 삶이 너무나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파주(坡州), 임진강과 한강을 좌우로 두며 천혜의 평야를 품고 있는 서기가 내린 땅.

박찬익은 1884년 1월2일 파주의 주내면에서 태어났다. 주내면은 대추가 많아 일명 대추골이라고 불렸는데 그 중에서도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있는 정승댁이 그의 집이었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려움 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하는 모습에 분개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래서 민영환 선생이 기울어가는 조선을 바로 세우고자 만든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에 입학하였다. 아직도 유교 교육관이 투철하던 시기에 그의 선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우국지사 민영환의 깊은 배려로 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대한제국의 슬픈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결국 관립상공학교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의를 여러 차례 하다가 발각되어 1904년에 퇴학당하고 말았다. 더불어 한일늑약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민영환 성생의 자결 이후 새로운 조국의 자주화 운동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상공학교 동기인 박호원의 주선으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가 궁극적 목적으로 설정한 것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지금 당장 힘이 없어 국권을 박탈당하였으므로 우선 무엇보다도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의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또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가의 주인인 ‘백성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박찬익이 한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집에 소속된 노비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평등을 지향하는 신민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백성들을 새롭게 만들어 새로운 조국을 만들자고 운동하는 이들이 봉건잔재의 산물인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찬익 역시 신민회의 강령에 동의하였고 자신들의 가족을 설득하여 노비를 해방시켰으니 이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찬익은 신민회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북지역을 다니면서 일본의 수탈로 점점 피폐해 가는 나라의 살림과 백성의 삶을 피부로 절감하면서 학교 설립운동과 야학운동에 주력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박찬익은 1907년 한일 신협약에 의해 나라는 기울어가고 나아가 조선인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치욕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일본인의 경제침탈이 노골화된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조선의 산업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일본에서 수입된 제품들이 조선땅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주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박찬익은 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금 같은 가내 수공업이 아닌 대량의 일본 제품에 대항 하려면 근대적인 기술과 공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박찬익은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에 입학하고자 결심하였다.

관립공업전습소는 박찬익이 다니던 상공학교의 후신으로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동숭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박찬익은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궁금해하면서 평양의 안창호 선생을 찾아갔다. 안창호 선생의 격려에 힘입어 박찬익은 양반 사대부들이 천대시하는 공업인의 길로 들어섰다. 박찬익은 1908년 4월에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였고 가을에 조직적인 공업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공연연구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박찬익은 새로운 시대사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민족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찬익과 동지들의 노력은 아쉽게도 조국이 일제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 동급생이자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약속한 박승익 등 10여명과 함께 1910년 겨울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이상설·백순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대종교의 지도자 나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입도를 하였는데 이는 신앙관을 떠나 민족종교로서의 가치와 독립운동의 기치를 대종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박찬익은 1912년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 삼도구 청파동에 한국인 학교를 설치하고 애국사상과 자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힘썼다.

그러나 이 생활도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는 1915년 중국인 교육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 북간도를 떠나 길림으로 피신했다가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자신의 오랜 후원자이자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신규식 선생을 만나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하고 노령의 동지와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당시 신규식은 국제 정세, 특히 중국의 정세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동주공제(同舟共濟)’ 즉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박찬익과 함께 동제사를 중심으로 교육운동과 군사 훈련을 활성화시켰다.

박찬익이 조선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로 성장한 것은 1918년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12월 조소앙·김좌진 등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독립선언서 발표는 1919년 3·1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3·1만세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 30여 인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 육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1919년 4월에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 박은식·신채호 등과 같이 평정관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정의단이 서일(徐一) 중심으로 대한군정서로 개편되었을 때 외교처장직을 겸임하여 이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켰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업무를 전담, 대중외교에 전념하였다. 당시 외무총장 신규식이 국무총리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외교업무를 대행했던 것이다.

그 해 8월에는 안창호와 같이 재정적으로 궁핍해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 의연금 모금에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9개 국이 참가한 워싱턴 태평양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의 간사로 선임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해 11월 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공세를 펼 때 사위인 그가 부사로 활동하여 중국 호법정부 총통 손문(孫文)으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아냈다.

1922년 9월에 신규식이 죽자 동제사 이사장이 되어 한중합작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1932년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이동녕·김구(金九)를 도피시켰다. 1933년 5월 김구와 같이 난징중앙군관학교(南京中央軍官學校) 구내에서 장개석(蔣介石)과 면담하여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여 한국인 청년을 입교시켜 군간부 양성에 기여하였다.

박찬익은 성정(性情)이 강직하고 남다른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 상대방의 신임을 얻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탁월한 중국어 실력으로 만주의 군벌들이나 국민당의 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임시정부의 경제적 지원이나 만주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에 있어서 만주 군벌들의 양해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박찬익이 신규식 선생을 따라 일찍이 중국 국민 혁명의 원로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따라서 중국 국민당 요인들도 박찬익을 북벌의 선배로 혹은 동지도 대접하였다. 뿐만 아니라 박찬익은 중국인을 움직일 줄 알았다.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실무자들이 광복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군사 실무적으로 처리함에 따라 통수권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마다 박찬익은 국민당 요인들과 여러 가지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나갔으며, 광복군 지원문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자는 주장을 폄으로써 당황한 중국 요인들이 광복군에 대한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게 한 것도 역시 박찬익이었다. 결국 박찬익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미미한 수준으로 그쳤을 것이며, 광복군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조국이 해방되었을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 대부분이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상황에서 자신도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뒤처리를 담당하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약관의 나이에 조국을 떠나 38년만에 돌아온 그는 모진 고생 끝에 얻은 병마로 돌아온지 7개월 만인 1949년 3월9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마도 그가 있었다면 탁월한 협상력으로 좌우의 대립과 분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혼탁하고 분열된 시대에 제2의 박찬익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200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추대됨을 진심으로 기뻐한다.

 김준혁 경기문화연구소 연구원(출처: 경기일보)

주석 :

  1. 한국최초의 실업교육기관으로서 서울공고와 서울공대의 전신 [본문으로]
  2. 한일합방 전 일제에 의해 관립공업전습소로 바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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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

전공

성  명

 

초대

 3

염직

박  찬  익

 상해임시정부 법무부장, 초대 공업연구회장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 교장이 교우회장을 겸임

2

6

염직

한  진  범

 

3

27 

건축

조  정  구

 전 국회의원, 전 삼부토건(주) 회장

4

28

건축

변  형  권

 전 평화건설(현 롯데건설) 회장

5

32

방직

민  유  동

 전 총무처 차관

6

33

건축

조  창  구

 전 삼부토건(주) 회장

7

37

방직

이  유  신

 전 삼화주택(주) 회장

8

37

전기

최  종  성

 전 건설부 차관

9

35

토목

한  상  억

 전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회장

10

47 

기계

정  진  원

 원풍실업(주) 회장

11

48 

전기

설  진  근

 전 대한전문건설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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