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고종 21) ~1949.
경기 파주
상해임시정부 국무위원(법무부장)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상해임시정부 대중국 외교활동의 중심인물이었고, 해방후에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서 적극활동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남파(南坡). 일명 박정일(朴精一)·박순(朴純)·박창익(朴昌益). 1904년 상공학교 재학중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 퇴학당한후, 1907년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관립공업전습소 를 졸업하고 한일합병이되자 만주 용정으로 망명해 이상설 등과 함께 독립투쟁에 가담하는 한편, 나철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해 정교(正敎)로서 포교활동도 했다. 이후 상하이[上海]로 가서 신규식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고 노령의 동지들과 긴밀히 연락했다. 1918년 11월지린[吉林]에서 조소앙·김동삼 등 39명 명의의 무오독립선언 발표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임무를 전담했다. 같은 해 11월 쑨원[孫文]의 중국국민당이 광둥[廣東]에 중국호법정부(中國護法政府)를 수립하자 신규식과 함께 외교를 전개, 임시정부를 승인하게 하는 등 대중국외교를 담당했다. 1930년 한국국민당조직에 참가하고 대한독립당 대표로 난징[南京] 정부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의 의거 이후 임시정부를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해 중국정부와 교섭을 벌였으며, 난징 중앙군관학교, 뤄양[洛陽]군관학교에 독립군 간부양성 과정을 설치하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임시정부가충칭[重慶]으로 옮긴 후 국무위원으로 활약했으며,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해방 후에는 임시정부 주화(駐華) 대표단장으로 활동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출처; 브리태니터배과사전)
▣ 임시정부 외교 도맡아… 한중합작 항일투쟁 주도
2009년 7월30일 독립기념관과 국가보훈처는 8월의 독립운동가로 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선생님을 선정하였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선생님의 공적이 늦게 세상에 알려진 느낌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세상 모든 이들에게 선생님의 존재가 알려진 것은 너무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임시정부의 외교를 책임지고 광복군을 조직했던 그가 이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남에게 공을 돌리는 겸양과, 직책이나 명성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분방한 천품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평생 그의 삶이 너무나도 대단했기 때문이다.
파주(坡州), 임진강과 한강을 좌우로 두며 천혜의 평야를 품고 있는 서기가 내린 땅.
박찬익은 1884년 1월2일 파주의 주내면에서 태어났다. 주내면은 대추가 많아 일명 대추골이라고 불렸는데 그 중에서도 아름드리 대추나무가 있는 정승댁이 그의 집이었다.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려움 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하는 모습에 분개해서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그래서 민영환 선생이 기울어가는 조선을 바로 세우고자 만든 관립상공학교(官立商工學校)에 입학하였다. 아직도 유교 교육관이 투철하던 시기에 그의 선택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우국지사 민영환의 깊은 배려로 학교를 다니며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대한제국의 슬픈 현실에 분노하고 있었다. 결국 관립상공학교에 재학 중 국권회복을 위한 모의를 여러 차례 하다가 발각되어 1904년에 퇴학당하고 말았다. 더불어 한일늑약으로 자신이 존경하는 민영환 성생의 자결 이후 새로운 조국의 자주화 운동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상공학교 동기인 박호원의 주선으로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신민회가 궁극적 목적으로 설정한 것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 독립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지금 당장 힘이 없어 국권을 박탈당하였으므로 우선 무엇보다도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의 양성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또한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고 있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상에 기초하고 있었다.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가의 주인인 ‘백성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박찬익이 한 첫 번째 일은 자신의 집에 소속된 노비를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평등을 지향하는 신민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백성들을 새롭게 만들어 새로운 조국을 만들자고 운동하는 이들이 봉건잔재의 산물인 노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찬익 역시 신민회의 강령에 동의하였고 자신들의 가족을 설득하여 노비를 해방시켰으니 이는 참으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찬익은 신민회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서북지역을 다니면서 일본의 수탈로 점점 피폐해 가는 나라의 살림과 백성의 삶을 피부로 절감하면서 학교 설립운동과 야학운동에 주력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박찬익은 1907년 한일 신협약에 의해 나라는 기울어가고 나아가 조선인 군대마저 해산당하는 치욕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일본인의 경제침탈이 노골화된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조선의 산업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로지 일본에서 수입된 제품들이 조선땅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주경제의 중요성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박찬익은 기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금 같은 가내 수공업이 아닌 대량의 일본 제품에 대항 하려면 근대적인 기술과 공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박찬익은 관립공업전습소(官立工業傳習所)에 입학하고자 결심하였다.
관립공업전습소는 박찬익이 다니던 상공학교의 후신으로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동숭동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박찬익은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궁금해하면서 평양의 안창호 선생을 찾아갔다. 안창호 선생의 격려에 힘입어 박찬익은 양반 사대부들이 천대시하는 공업인의 길로 들어섰다. 박찬익은 1908년 4월에 관립공업전습소에 입학하였고 가을에 조직적인 공업 연구의 필요성을 깨닫고 공연연구회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박찬익은 새로운 시대사조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는 민족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박찬익과 동지들의 노력은 아쉽게도 조국이 일제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래서 학교 동급생이자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약속한 박승익 등 10여명과 함께 1910년 겨울 만주 용정으로 망명하였다.
북간도에서 이상설·백순 등의 지도로 독립투쟁을 계획하는 한편, 대종교의 지도자 나철(羅喆)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대종교에 입도를 하였는데 이는 신앙관을 떠나 민족종교로서의 가치와 독립운동의 기치를 대종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던 박찬익은 1912년 중국 관헌의 지원을 얻어 화룡현 삼도구 청파동에 한국인 학교를 설치하고 애국사상과 자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시에 대종교의 정교직을 맡아보면서 포교에도 힘썼다.
그러나 이 생활도 오래 갈 수 없었다. 그는 1915년 중국인 교육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 북간도를 떠나 길림으로 피신했다가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자신의 오랜 후원자이자 독립운동의 지도자였던 신규식 선생을 만나 동제사(同濟社)를 창설하고 노령의 동지와 긴밀하게 연락하였다. 당시 신규식은 국제 정세, 특히 중국의 정세를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공화주의 혁명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래서 ‘동주공제(同舟共濟)’ 즉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배를 타고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박찬익과 함께 동제사를 중심으로 교육운동과 군사 훈련을 활성화시켰다.
박찬익이 조선 독립운동의 중심 인물로 성장한 것은 1918년의 대한독립선언서 발표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18년 12월 조소앙·김좌진 등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있었던 독립선언서 발표는 1919년 3·1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3·1만세운동 이후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이동녕·이시영·조소앙 등 30여 인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면서 임시정부 육성에 진력하였다.
또한 서울에서 1919년 4월에 조직된 한성임시정부에 박은식·신채호 등과 같이 평정관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19년 8월 정의단이 서일(徐一) 중심으로 대한군정서로 개편되었을 때 외교처장직을 겸임하여 이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로 편입시켰다.
1921년 7월 임시정부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 대리로 외교업무를 전담, 대중외교에 전념하였다. 당시 외무총장 신규식이 국무총리를 겸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외교업무를 대행했던 것이다.
그 해 8월에는 안창호와 같이 재정적으로 궁핍해진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조직, 의연금 모금에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1921년 1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9개 국이 참가한 워싱턴 태평양회의가 열렸을 때, 임시정부에서 조직한 태평양회의 외교후원회의 간사로 선임되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그 해 11월 신규식이 중국 호법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외교공세를 펼 때 사위인 그가 부사로 활동하여 중국 호법정부 총통 손문(孫文)으로부터 임시정부 승인을 받아냈다.
1922년 9월에 신규식이 죽자 동제사 이사장이 되어 한중합작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1932년 윤봉길의 의거로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하자 이동녕·김구(金九)를 도피시켰다. 1933년 5월 김구와 같이 난징중앙군관학교(南京中央軍官學校) 구내에서 장개석(蔣介石)과 면담하여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게 하여 한국인 청년을 입교시켜 군간부 양성에 기여하였다.
박찬익은 성정(性情)이 강직하고 남다른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 상대방의 신임을 얻는 천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탁월한 중국어 실력으로 만주의 군벌들이나 국민당의 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임시정부의 경제적 지원이나 만주 지역에서의 무장투쟁에 있어서 만주 군벌들의 양해를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박찬익이 신규식 선생을 따라 일찍이 중국 국민 혁명의 원로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고, 따라서 중국 국민당 요인들도 박찬익을 북벌의 선배로 혹은 동지도 대접하였다. 뿐만 아니라 박찬익은 중국인을 움직일 줄 알았다.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의 실무자들이 광복군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를 군사 실무적으로 처리함에 따라 통수권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때마다 박찬익은 국민당 요인들과 여러 가지 문제를 정치적으로 풀어나갔으며, 광복군 지원문제가 벽에 부딪혔을 때 백범 김구 선생을 모시고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자는 주장을 폄으로써 당황한 중국 요인들이 광복군에 대한 전적인 지원을 약속하게 한 것도 역시 박찬익이었다. 결국 박찬익이 아니었다면 임시정부의 활동은 미미한 수준으로 그쳤을 것이며, 광복군 창설은 거의 불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조국이 해방되었을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상해 임시정부의 요인들 대부분이 조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상황에서 자신도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뒤처리를 담당하는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하지만 약관의 나이에 조국을 떠나 38년만에 돌아온 그는 모진 고생 끝에 얻은 병마로 돌아온지 7개월 만인 1949년 3월9일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아마도 그가 있었다면 탁월한 협상력으로 좌우의 대립과 분단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 혼탁하고 분열된 시대에 제2의 박찬익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200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추대됨을 진심으로 기뻐한다.
김준혁 경기문화연구소 연구원(출처: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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